영어 못해? 그럼 글로비쉬로--독자 대부분이 공감할 몇 가지 일화<2>
마르셀 디알은 1970년대 말에 다른 다국적기업의 지중해 지역 대표를 맡고 있었다. 그가 미국 지사에 2년 예정으로 발령을 받아 떠난 지 몇 주가 지났을 무렵, 나는 뉴욕 근처에서 그를 만날 수 있었다. 그런 다국적기업에서는 교육이나 출장 차 미국 본토로 직원을 보내는 일이 관례처럼 되어 있었다. 어떤 종교를 믿는 신도가 생전에 적어도 한 번은 성지순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과 비슷한 이유에서였다.
실망스럽게도 그는 업무 회의에 참석하는 것이 고역이라고 말했다. 업무에 대해서야 누구보다 잘 d라고 경험도 풍부한 그였지만 그것을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고, 대로는 전혀 입이 열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회의 참석자들이 한꺼번에 빠른 속도로 이야기하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해야 했다. 모두들 큰소리를 내서 틜 생각만 하고, 남의 말을 자르며 지식을 뽐내려고 애썼기 때문에 마르셀은 더더욱 회의 진행을 따라가기도, 대화에 참여하기도 어려웠다. 그가 문장을 머릿속으로 생각해서 가다듬은 뒤, 겨우 한마디 하려고 하면 대화는 이미 다른 주제로 넘어가고 난 뒤였다. 또다시 기차는 떠나고 마르셀 혼자 플랫폼에 서 있는 꼴이 되는 것이다. 매번 이렇게 기차를 보내 버리다 보니, 그는 속 쓰림에 위경련까지 생길 정도였다.
그는 사장이 왜 자신을 이곳에 보내 벙어리로 만들어 버렸는지 회의하기에 이르렀다. 슬픔과 실망이 번갈아 찾아왔다. 이런 두 감정이 그를 만성적인 우울증에 빠지게 만들었고, 그는 마침내 미국인들에게 적대감을 품게 되었다.
다국적기업이나 외국계 회사에 다니는 사람이라면 언젠가는 한번쯤 ‘conf-call’이라고 하는 국제 전화회의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전 세계의 지사 사무실에서 회의 참가자들이 특수 마이크로폰이 장착된 테이블에 모여 앉아 전화망에 접속하면, 모든 사람이 한꺼번에 통화를 할 수 있게 된다. 최소한의 교육만 받으면 누구든 토론에 참가할 수 있고, 발언은 하는 동안에는 아무도 중간에 가로챌 수 없다. 기술적인 이론은 그렇다는 말이다.
하지만 실제로 말은 하는 사람은 정해져 있다. 주로 대화를 이끌어 가는 것은 미국인이나 영국인이며, 영어권 국가에서 오래 체류했거나 그 밖의 이유로 영어를 쉽게 구사하는 사람들이다. 다른 사람들은 지식과 경험이 있어도 회의 도중 거의발언을 하지 않는다. 의사소통 도구의 부재와 소심함 때문에 얼마나 큰 낭비를 하고 있는 셈인가! 많이 아는 사람은 말을 안 하고, 많이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알아들을 수 없는 수다나 지껄이고 있으니 말이다---.
내가 전에 일하던 회사는 업무 회의를 정기적으로 가졌다. 그 회사는 ‘독점적, 다국적 상사’중 하나로, 전 세계의 125개 지점을 직접 관할했다. 파리에 있는 유럽 총 지부에는 40개가 넘는 다양한 국적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일을 하고 있었는데 이런 국제적인 분위기에서 프랑스어로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어느 날 소집된 업무회의, 이 회의에는 스펜인 출신의 카를로스, 이탈리아에서 태어나고 자란 기안카를로, 헬싱키에서 온 요르마, 리스본 출신의 외제니오, 일본인 사타케, 성격은 좋지만 정치 이야기를 건네지 말아야 할 칠레인 솔다드, 앵글로 색슨 계통의 외모를 가져 밥이라 불리는 벨기에인 로버트, 그리고 로잔 출신의 마르셀 등이 참석했다. 우리는 뉴욕에서 오는 짐(Jim)을 기다리고 있었다. 짐은 런던을 들러 영국 에이전트인 윌리엄과 함께 오기로 되어 있었다. 히스로 공항에서 걸려온 전화 내용으로는 비행기가 연착되어 도착시간이 많이 늦어질 것 같다고 했다.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동안, 바벨탑 안처럼 어수선하던 회의장 분위기는 점점 활기를 띠어 갔다. 프랑스어권 국가 출신의 참석자 세 명은 다른 나라 사람들이 대화에 낄 때는 프랑스어 사용을 자제했고, 대화를 주도할 정도의 실력은 아니었지만 모두들 영어로만 대화를 나눴다. 카를로스와 솔다드도 가급적이면 스페인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모두가 즐겁게 이야기를 나눴다. 회의가 늦어지자, 참석자들은 새로운 마케팅 개념을 도입하는 문제에 간해 각자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하지 않을 수 있으니 좋은 생각인 것 같았다.
레이디 퍼스트로 솔다드가 먼저 발언권을 얻었다. 그녀는 더듬거리며 말을 시작했다. 발음은 형편없었지만, 현장에서의 어려움과 실망스러운 점들을 구체적으로 설명해 나갔다. 기안카를로는 자신도 솔다드가 말한 문제점들을 부분적으로 겪었지만 어떻게 단시간 내에 놀라운 성과를 거둘 수 있었는지에 대해 들려주었다. 내 차례가 오고, 다른 참석자들도 번갈아 발언을 했다. 좀 더 명확한 설명을 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보충 설명을 해주기도 하고, 상대방의 말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경우 질문이 오고갔다.
그 때, 짐과 윌리엄이 도착했다. “Hi, guys. Nice to see you. Sorry for being so late.” 두 동료가 자리를 잡았다. 짐은 회의를 주재하기 위해 발언을 시작하면서 회의 의제(agenda)를 제시하고, 자신의 견해를 밝히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때부터 아무도 말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질문을 하는 사람도 없었고, 그가 한 말을 다시 확인하려고 드는 사람도 없었다. 아무도 말을 덧붙이거나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고, 조금 전과 같은 토론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윌리엄만 가끔 끼어들 뿐이었는데, 그렇다고 짐이 제시한 아이디어에 동의하는 것도 아니었다. 결국 우리는 두 영미권 친구들만의 비밀회의를 지켜보거나 유창한 영어로 된 독백을 듣고만 있었던 셈이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