食傳(식전)--국수가 쌀밥보다 귀했던 시절
밀
이번에는 밀을 살펴보기로 하자. 밀은 세계의 여러 곡식 가운데에서도 가장 먼저 작물이 된 종에 속한다. 밀은 아프가니스탄과 캅카스가 원산지로 알려져 있는데,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수메르 인들이 야생 밀을 심어 본격적인 농업의 시대를 여는 계기가 되었다.
더위에 약해 열대 지방에서 재배할 수 없는 점을 빼면 생장조건이 그다지 까다롭지 않기에 온대 지방, 동쪽으로는 중국과 한국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서유럽을 포함하는 구대륙의 세계 여러 지역으로 퍼질 수 있었으며 세계에서 가장 보편적인 곡식의 지위를 차지했다. 세계 전체의 생산량으로 따지면 신대륙의 작물인 옥수수가 밀을 능가하지만 옥수수는 주로 동물의 사료용으로 쓰이기에, 사람이 먹는 곡식으로는 밀이 단연 으뜸이다.
생김새를 보면 이삭에 기다란 수염 같은 까락이 달린 것이 보리와 아주 비슷하다. 우리는 보리를 먼저 길렀고 밀은 그보다 늦게 재배하기 시작했기에 보리를 대맥, 밀을 소맥이라 부른다. 우리나라에서 밀농사를 시작한 것은 무척 오래되었지만 조와 기장, 보리와 쌀에 밀려 주곡의 위치를 차지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여름에는 무척 고온인 우리나라에서는 밀이 잘 자라지 않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그렇지만 밀은 단 것을 만드는 데에 쓰는 맥아처럼, 술을 빚는 누룩의 원료가 되는 절대 효용가치를 지닌다. 밀밭에 가면 저절로 취한다는 이야기는 술을 만드는 데에 꼭 필요한 발효제인 누룩을 반드시 이 밀로 만들어야 하는 까닭에 생긴 말이다.
로마의 기술진보를 이끈 밀
밀 이야기는 잠시 동양을 벗어나 서양으로 갈 수밖에 없다. 서양의 역사에서는 로마가 밀을 주식으로 한 이래로, 밀은 곡물 가운데 가장 중요한 위치에서 벗어난 적이 한 번도 없다. 서양의 대표적인 잡곡인 귀리와 호밀은 언제나 밀의 대용품 위치밖에 차지한 적이 없었다. 로마에서는 밀이 부족하면 아주 심각한 일이었다. 밀을 확보하려고 시칠리아와 이집트 등 지중해의 산지에서 밀을 사들였고 로마의 위정자들은 시민에게 값싼 밀을 공급하는 것이 우선 과제였다.
이런 전통은 현재까지 이어진다. 미국으로 이민 온 이들 가운데 빵집을 운영하는 사란은 대부분 이탈리아 출신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빵이라고 하면 독일이나 프랑스의 빵부터 알려졌지만 밀가루를 다루는 데에는 역시 이탈리아 사람들이다. 이탈리아의 파스타와 피자는 미국에서 가장 대중적인 음식이 되었다. 파스타의 수많은 종류만 보더라도 이탈리아 사람들이 얼마나 밀을 다루는 데에 능숙한지 알 수 있다. 물론 현재는 프랑스나 독일 같은 유럽의 여러 나라도 많은 종류의 빵과 밀가루 음식을 즐기지만 그래도 아직은 이탈리아 사람들을 따를 방도가 없는 것 같다.
로마는 특히 과학보다는 실용적인 기술이 발달한 나라였다. 어떤 역사학자들은 로마의 기술이 진보한 바탕에 밀이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밀 도정의 어려움이 기술적인 진보를 가져왔다는 뜻이다.
쌀이나 보리의 도정도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쌀과 보리는 단단하게 말린 알곡을 절구에 넣고 공이로 찧는 것만으로도 껍데기를 벗겨낼 수 있었다. 하지만 밀은 이렇게 해서는 도정할 수가 없다. 밀은 낱알이 쉽게 깨지기 때문에 껍데기만을 손쉽게 분리할 수 없다. 따라서 밀은 말린 알곡을 통째로 부서뜨려 가루를 내고, 체에 걸러서 껍데기를 제거하고 가루를 따로 모아야만 한다. 이렇게 하면 껍질이 가루에 많이 섞이게 되니 순수한 배젖만 분리해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렇기에 도정방법에 따라 밀가루의 품질이 현격한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또 밀의 제분은 집에서 손쉽게 해결할 수 있는 과정이 아니었기에 제분공장을 만들어 대규모로 하는 것이 훨씬 이득이 됐다. 그렇기에 수력 같은 자연의 힘을 빌리거나 동물의 힘을 이용하는 것이 한층 유리했다. 또 도정기구를 제작하고, 껍질과 가루를 분리하기 위해서도 송풍장치 같은 여러 기계의 힘을 빌려야 했다. 이처럼 밀의 도정과 제분이라는 공정에는 수많은 순서와 도구가 필요했기 때문에 자연히 로마의 기술발전을 촉진했다는 것이다.
물론 로마의 기술발전에는 물을 확보하기 위한 수로의 건설, 일찍이 도로의 중요성을 인식한 토목기술의 발달, 그리고 수많은 전쟁 등 많은 요인이 있었겠지만 밀을 주식으로 했던 것도 그 원인 중 하나였으리라.
현재를 보더라도 쌀의 도정공장은 아주 작은 규모로도 가능하고 실제로 쌀의 산지마다 조그만 정미소가 세워져 있다. 심지어 요즘에는 마크나 슈퍼마켓에서 더 신선한 맛을 위해 소규모의 기계를 설치해두고 직접 도정해서 팔기도 한다. 반면 밀은, 대부분의 원료를 수입하는 것도 그 원인이겠지만 대규모 제분공장이 따로 있다. 밀은 제분하려면 더 큰 규모의 공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또 밀가루는 찰기에 따라 강력분, 중력분, 박력분으로 나누는데, 이 구분은 밀가루 안에 포함된 글루텐이라는 단백질의 함량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다. 강력분은 주로 빵을 만들고, 중력분으로는 국수나 전, 박력분으로는 과자나 케이크를 만든다. 물론 도정하는 밀이 경질인가 연질인가에 따라 글루텐의 함량도 차이가 나지만 제분과정에서도 배젖 부위에 따라 차이가 난다. 용도에 맞는 밀가루를 생산해야만 음식이 제대로 될 수 있으니 그러려면 더 큰 규모의 공장에서 세심한 가공공정을 마련하는 수밖에 없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