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전(食傳)--도토리묵에 담긴 배고픔의 사연
도토리는 그 많은 구황음식 중에서도 아주 독보적이다. 다른 것들이 풍부한 열량을 주지 못하는 반면, 도토리에는 탄수물이 많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도토리는 참나뭇과에 속하는 상수리나무, 신갈나무, 굴참나무, 떡갈나무 등의 열매로 이 나무들은 우리나라 숲의 주력으로 온대 지방에 흔하다.
도토리에는 탄수화물인 녹말이 많이 들어 있지만, 다른 짐승들이 자신의 씨앗을 먹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타닌이 포함되어 있어 맛이 무척 쓰다. 이 도토리를 먹을 수 있는 것은 쓴맛에 적응한 다람쥐나 멧돼지 같은 짐승들이나 곤충들밖에는 없다. 하지만 타닌이 물에 녹는 수용성인지라 도토리를 갈아 물에 여러 번 침전시키면 그 쓴 맛을 어느 정도 가시게 할 수 있다. 무척 고단한 작업이지만 기근을 이기는 데에 이것보다 더 좋은 열매를 찾기 어렵다.
다만 열매를 맺는 시기가 가을이라 기근이 가장 심할 때인 봄철과 여름철에 열리지 않는다는 게 큰 흠이지만, 가을 산에게 가서 품을 들이면 엄청난 양을 수확할 수 있으니 이듬해의 기근을 대비해서라도 가을에는 이 도토리의 수확에 공을 들였을 것이고 도토리를 말려 가루를 내고 쓴 맛을 제거하여 묵가루를 만들어두었을 것이다. 나중에는 도토리묵도 차츰 구황식품의 굴레에서 벗어나 완전한 음식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여하튼 반복되는 기근은 인구증가와 국력 신장에 큰 장애물이었다. 구휼제도를 정비하고 기근의 대처법을 반포하는 것만으로는, 때때로 찾아오는 자연재해로 말미암은 기근의 피해를 조금 줄일 수 있을지는 몰라도 도저히 근본적인 대책이 되지 못했다. 많은 이의 배고픔을 달래줄 진정한 구황작물의 등장이 필요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것이 이 땅에 도착한 것은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닿고 나서도 한참 지나서였다.
콜럼버스는 대서양과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오랜 기간 떨어져 있던 아메리카 대륙에 첫발을 내디뎠다. 신대륙에는 놀라운 식물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 숨어 있던 식물들이 하나둘씩 구대륙에 전파되기 시작했다. 탐험가의 멋을 표현해주는 담배는 얼마 지나지 않아 들불처럼 구대륙을 휩쓸었지만 먹는 작물들은 그렇게 빨리 퍼진 편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들 작물 가운데에는 구대륙의 인구를 혁신적으로 증가시킨 세 가지 작물이 있었다. 옥수수, 감자와 고구마 바로 그것이다.
구황작물 삼총사의 등장
밀이나 쌀, 보리 같은 구대륙의 작물은 생육기간이 길다. 씨를 심어서 곡식을 거둘 때까지 보통 6개월은 지나야 한다. 아무리 조숙종이라 하더라도 다섯 달은 걸린다. 그렇기에 열대 지방을 제외하면 1년에 한 번 농사를 짓는 것이 고작이다. 더군다나 생육조건이 까다로워 일정 기간 햇빛이 필요하고 너무 추운 고산 지방에서는 농사를 지을 수 없다. 안개가 많이 끼거나 기온이 낮은 지역에서는 농사를 지을 수 없고 초지를 가꾸어 가축을 기르는 수밖에 없었다. 한정된 곡물의 생산, 흉년으로 인한 식량부족, 전염병 등은 오랫동안 인구의 증가를 막아온 장치였다. 그렇지만 이 신대륙의 작물들은 달랐다. 이 중 가장 뛰어난 생산력을 보인 것은 감자다.
감자는 콜럼버스의 발견 이후 유럽으로 전래되었지만 식량으로서 효용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거의 200년이라는 세월이 지나서였다. 곡물농사가 쉽지 않은 아일앤드는 거의 주식으로 삼다시피 감자가 확산되었고, 영국과 독일, 북유럽, 러시아와 같이 기후가 좋지 않은 지역에서도 주곡의 위치를 넘보게 되었다.
앞서 된장찌개 이야기를 하면서 언급했듯, 감자가 우리나라에 전래된 것은 1825년 무렵 유럽을 건어 중국을 거쳐 들어온 것으로 보이며, “원저보”에는 1832년 네덜란드이 선교사가 감자 종자를 농민들에게 나누어주고 재배법을 가르쳤다는 기록도 있다. 이를 종합해보면 감자는 19세기 후반 무렵에나 퍼지기 시작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씨감자를 4월 초에 심으면 하지인 6월 말에는 벌써 수확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하지에 일찍 수확하는 감자를 하지감자라 부른다. 그때는 논에 모를 낸 벼들이 이제 조금 자랐을 시점이다. 석 달이 미처 못되는 시간에 거둘 수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햇빛이 조금 모자라도, 기온이 낮아도 감자는 잘 자란다. 이렇게 빨리 탄수화물 덩어리를 제공하는 작물은 없다. 감자의 또 다른 장점은 조리하는 데에 곡식보다 시간이 덜 걸려 땔감을 적게 소모한다는 것이다.
수확이 감자보다 늦기는 하지만 옥수수도 한여름이 채 지나기도 전에 굵은 알곡을 인간에게 선사한다. 고구마도 감자보다는 생장기간이 긴데, 이 셋 중에서 우리나라에 가장 먼저 들어온 작물이다. 감자와 옥수수가 중국을 우회해서 늦게 전해졌다면, 고구마는 고추처럼 일본을 통해 들어왔기에 조금 더 일찍 들어올 수 있었다.
1763년 통신사로 일본에 간 조엄은 대마도에서 고구마를 보고 구황작물로서의 가능성을 발견한 것 같다. 그래서 이를 들여와 심었지만 재배가 쉽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 뒤로 이광려가 동래에 가서 고구마를 얻어다 기르며 고구마의 재배와 보급에 힘을 기울였고 서유구는 “종저보”라는 책을 지어 고구마 보급에 나선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고구마가 전국에 퍼져 제대로 구황작물의 역할을 할 수 있게 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아직은 그렇게 생산량이 많지 않았고 동래 지방을 중심으로 할 뿐 넓은 지역에서 재배된 것이 아니기에 그저 특별한 먹을거리에 머물렀던 것 같다.
옥수수의 재배는 18세기 초엽 명나라로부터 전해진 것 같지만 처음 문헌에 나오는 기록은 1766년의 “증보산림경제”에 그 이름이 보인다. 옥수수라는 이름은 전체 모습이 수수와 비슷한 모양을 하고 알갱이가 옥과 같다고 해서 붙여졌지만 ‘강냉이’라는 다른 이름도 있다. 강냉이는 원래 중국 강남에서 왔다는 의미의 ‘강남이’가 변해서 된 말이다. 옥수수는 벼 같은 곡물에 비해 생육기간이 훨씬 짧아 평안도, 함경도, 강원도와 같은 산간 지방에서도 재배할 수 있다. 옥수수는 이들 자방을 중심으로 차츰 그 세력권을 넓히게 된다.
헐벗은 날들의 기억을 되새기며
이 세 가지 구황작물이 18, 19세기에 이 땅에 상륙한 것은 틀림없으나 곧바로 활발하게 재배된 것은 아니었다. 재배법을 제대로 알지 못했거니와 새로운 작물이 전국적으로 퍼지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어쨌거나 초창기에는 고구마가 감자보다 훨씬 강세였다. 1911년에 전국의 감자 생산량은 230만 관에 조금 못 미치지만, 고구마는 1,230만 관이나 생산한다. 그러던 것이 1940년이면 감자 1억 7,800만 관, 고구마 8,790만 관으로 상황이 역전되고 만다. 1940년 무렵 옥수수는 전체 곡식 가운데 비중이 0,035퍼센트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사실을 보면, 구항식물로 제 역할을 제대로 해낸 것은 가장 늦게 전래된 감자였으며 그것도 일제 강점기에 와서야 비로소 급증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는 19세기 말까지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온 구황작물이 큰 구실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감자와 고구마가 전국적으로 보급된 까닭은 일제의 쌀 욕심 때문이었다. 자신들에게 모자란 쌀을 반출해 나가면서 이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대체식량을 주어야 했다. 그래서 그 35년을 겪으면서 고구마, 감자, 옥수수가 전국적으로 확실하게 자리를 잡게 되었다. 물론 일본이 떠나간 뒤에도 이 작물들은 우리 농토에 그대로 남았다. 그리고 이 작물들 덕분에 헐벗고 가난한 시기를 이기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 20세기에 들어와 인구가 급증한 것은 이들 덕분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기근에는 곡물만 있으면 살 수 있는 게 아니다. 몸에 필요한 또 하나의 필수품은 염분이다. 아무리 초근목피를 먹어도 소금이 없으면 몸에 필요한 전해질을 보충할 수 없어 대사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염분의 대부분을 김치나 장으로 해결한다. 김치를 담글 여유는 없어도 장 담그는 것은 적극적으로 권장했다. 그렇지만 기근에는 콩으로 메주를 띄울 여력도 없었다. 그래서 “증보산림경제”는 더덕, 도라지, 콩잎, 느릅나무껍질을 이용해 장을 담글 것을 주문하고 있다. 악간의 탄수화물과 소금기라도 섭취해 죽음을 모면하려는 눈물겨운 노력이 아닐 수 없다.
기근을 겪는 사람의 처지에서는 생존을 위해 최소한의 것이라도 먹으려는 노력이 애처롭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노력이 먹을거리의 저변을 넓히는 방편도 되었다. 아마도 그 많은 근채와 나물은 그렇게 개발되었을 것이다. 먹을거리가 너무도 풍족한 요즘이지만 도토리묵에 막걸리 한 사발을 마시면서 되새겨봐야 할 헐벗은 날들의 기억이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