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전(食傳)--물고기는 육식이 아니었다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라 해안선이 긴 나라에 속한다. 사정이 그러니 바다에서 고기를 잡는 것이 식량채취의 기본적인 수단이었음은 당연하다. 바다에서 소금을 얻을 수도 있으니 물고기가 썩지 않게 염장하는 기술도 일찍 발달했다. 배를 만들어 무역을 할 만큼 조선술이 발달한 시기에는 가까운 바다에 나가기도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바다에서 그물을 끌어 올려 물고기를 잡는 일은 그다지 쉽지 않았다. 바다에 사는 물고기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 것 같지만 잡는 방법에 따라 먹는 생선도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물론 지금은 물고기를 하도 많이 잡아먹어 물속에 있는 개체수도 현저하게 차이가 난다.
고려시대의 어업을 보면 고기잡이배가 있기는 했지만 대개 어량을 설치해놓고 간조의 차이로 물고기를 가두어 잡는 어업이 주류였던 것 같다. 어량은 고정적인 설치물로, 간조의 차이가 심한 바닷가 개펄에다 돌이나 나무, 대나무 또는 그물로 막아놓고 함정을 설치해 썰물이 되어도 물고기가 빠져나가지 못하게 한 장치다. 썰물이 되면 바구니나 손에 들 수 있는 그물을 가지고 가서 물고기를 주워 담는다. 돌로 쌓아 반영구적인 장치를 만들기도 하지만, 조수의 힘 탓에 망가지므로 때때로 보수를 해줘야 한다. 이것이 대체로 조선시대 말까지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는 대표적인 방법이었다. 잡히는 물고기는 때에 따라 달랐겠지만 주로 근해에서 노니는 고기였다.
이 어량은 소금과 함께 풍부한 수입을 가져다주었기에 대부분이 지방토호의 큰 재산이었고 고려시대에는 어량을 권문세가에 상으로 주는 일도 많았다. 서긍이 쓴 “고려도경”에는, 고려 사람들이 권문세가는 고기를 주로 먹고 상민들은 수산물을 많이 먹는다고 했는데, 여기서 수산물이란 주로 조개와 굴, 새우젓, 그리고 미역, 다시마, 김과 같은 해조류를 뜻한다.
고려는 불교가 국교라 살생을 금한다고 해서 고기 먹는 것을 금기시했겠지만, 돈 많고 권력 있는 권문세가에서는 양과 돼지를 키워 먹었던 것 같다. 그리고 사람들은 뭍에서 자라는 소나 돼지 같은 가축을 잡는 것은 살생이라 했지만 물고기는 그런 생각을 거의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일본도 황실에서 불교를 믿어 도축을 금했지만 물고기까지 금하지는 않았다. 일본이 물고기를 많이 먹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서구에서도 사순절 기간에 육식을 금했지만 생선은 예외였다. 인간이 보기에는 물속에서 자라는 생선이 인간과 너무 다르기에 생명으로 취급하지 않은 듯싶다. 아무튼 고려의 귀족들은 저희들은 고기를 먹고 서민에게는 저희들 소유의 어량에서 나는 해산물과 염전의 소금을 팔아 이익을 챙겼으니 극락왕생한 사람은 별로 없을 성싶다.
생선 외에 해조류를 많이 먹는 것도 우리나라 수산물채취의 큰 특징 같다. 우리는 지금도 김, 다시마, 미역, 파래, 톳, 매생이 등을 비롯해 해조류를 아주 즐기는 편이다. 일본도 우리 못지않게 해조류를 먹기는 하지만 별로 즐기지도, 많이 먹지도 않는다. 서구는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또 하나 특징은 일본과 같이 생선을 회로 즐겼다는 점이다. 생선을 회로 즐기는 전통은 일본과 한국 밖에 없다. 한국은 생선 말고 육회도 즐겼으니 날것을 먹는 것은 원래 식생활 전통이었던 것이다. 이 전통은 유교를 숭상한 조선시대에는 공자가 날고기를 먹었다 하여 더욱 공고해졌다. 물론 신선하게 운반하기 어려우니 내륙에 사는 사람들은 소금에 절이거나 말린 생선, 젓갈밖에는 먹지 못했겠지만 그래도 왕공귀족들은 신라나 조선의 석빙고에서 보듯 겨울 얼음을 저장해 여름에 신선한 생선을 먹는 데에 쓰기도 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