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만 읽는 바보--두 번째 이야기(백탑 아래서 벗들과)
내가 있을 자리
군신유의(君臣有義), 임금과 신하 사이에는 의리가 있어야 한다.
부자유친(父子有親),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는 친근함이 있어야 한다.
부부유별(夫婦有別), 남편과 아내 사이에는 분별이 있어야 한다.
장유유서(長幼有序), 어른과 아이 사이에는 차례가 있어야 한다.
붕우유신(朋友有信), 벗과 벗 사이에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누구나 삼강오륜(三綱五倫)에 기대어 살아간다. 글을 읽은 사람은 물론, 그렇지 않은 소박한 백성들도 마음의 뿌리를 이 오륜에 두고 있다. 아이 때부터 외우고 다니는 다섯 가지 덕목은 그다지 어려운 것도 아니어서 누구나 노래를 부르듯 기억하고 있다. 이를 지키지 않으면 윤리를 깨뜨리는 패륜이라 하여, 사람들 사이에 발딛고 살 수 없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나는 오륜을 이야기하는 것이 서글펐다. 어느덧 글을 배울 만큼 자란 자식 앞에서도 그랬고, 나에게 글을 배우러 몰려온 동네 아이들 앞에서도 그랬다. 놀이처럼 재잘대며 다섯 가지 덕목을 종알거리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내 마음은 막막하기만 했다.
군신유의라, 임금과 신하 사이에는 의리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의리로써 임금을 대할 기회가 나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다. 벼슬길에 나아갈 수 없는 나에게 군주는 그저 아득히 먼 존재일 뿐이었다. 그 은혜와 손길을 느낄 수가 없고, 나 역시 피가 도는 뜨거운 마음으로 나의 군주에게 의리를 바칠 수가 없었다.
부자유친이라,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는 친근함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아버님을 뵐 때마다 내 마음은 늘 아려 온다. 아들을 낳고부터는 더욱 그랬다. 아비로서의 지극한 정으로도, 나와 같은 처지를 아들에게 물려주어야 하는 현실을 바꿀 수는 없었다. 아버님 역시 그러하셨을 것이다. 아버님과 나에게는, 그리고 나와 나의 아들에게는, 부자로서의 친근함 이전에 흐르는 감정이 있다. 서자의 처지라는 공통의 운명을 짊어지고 살아야 하는, 서로에 대한 안쓰러움이다.
부부유별이라, 남편과 아내 사이에는 분별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아내에게도 나와 마찬가지로 서출(庶出)이라는 피가 흐르고 있다. 처가는 무인의 집안이지만, 그 활달하고 씩씩한 기운으로도 신분의 굴레가 주는 그늘을 아주 없애지는 못했다. 아내 역시, 아버지와 형제들의 우울한 한숨과 끈끈한 탄식 속에서 자랐을 것이다. 아비와 어미에게서 그러한 피를 물려받은 나의 자식들 역시 그러할지 모른다. 그러한 자식들을 바라보는 아내의 심정도 나와 마찬가지로 절망적이고 우울하리라. 부부는 이렇게 다르지 않다.
장유유서라, 어른과 어린아이 사이에는 차례가 있어야 한다. 물론 어린 사람은 나이 든 사람을 공경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예외는 있다. 우리 같은 서자 추신은 머리가 허옇게 센 노인이라도, 본가의 어린아이에게까지 존댓말을 써야 한다. 간혹 보잘것없는 벼슬이나마 관직에 나아간다 하더라도, 서출의 자리는 따로 있었다. 당당한 적자의 출신의 사대부들끼리 차례를 지켜 앉은 다음, 그 아래쪽에 따로 앉았다. 앉은 자리가 남쪽이라 하여 우리를 ‘남반(南班)’이라 조롱하기도 했다.
붕우유신이라, 벗과 벗 사이에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오륜이 나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에게도 공평하게 한자리를 내어주는 것은 오직 이 항목뿐이다. 임금과 신하, 아버지와 아들, 남편과 아내, 어른과 아이, 사람들 사이의 어떠한 곳에서도 우리가 마음 편히 있을 자리는 없었다. 우리가 사람다운 대접을 받고,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것은, 오직 마음에 맞는 벗들과 함께 있는 그 순간뿐이었다.
나는 언제나 이러한 벗들이 그리웠다. 내 입으로 글을 읽어도 듣는 것은 나의 귀뿐, 내 손으로 글을 써도 보는 것은 나의 눈뿐, 오로지 내가 나를 벗으로 삼아 위안해 온 세월이 너무나 길었다.
그러나 오랜 기다림 끝에 나도, 드디어 소중한 벗들을 만나게 되었다. 벗들에게로 가는 길을 나에게 내어 준 것은, 은은한 달빛 아래 더욱 환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백탑이었다. 탑은 제 그림자를 다리처럼 길게 놓아, 벗들에게로 가는 길을 만들어 주었다. 또한 내가 오래도록 머무를 자리도 만들어 주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