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개화기 영어 이야기--배즐 홀 함장의 영어 전수

리첫 2018. 1. 7. 15:36

개화기 영어 이야기--배즐 홀 함장의 영어 전수

 

1816년은 한국인이 영어를 배우고 발음한 사실을 기록상으로 확인할 수 있는 해로서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영국 군함 라이라(Lyra)호와 알세스트(Alceste), 프리깃호(Frigate)는 청국에 파송되는 특명전권대사 앰허스트(Sir Jeffrey William Pitt Amherst) 남작 일행을 천진까지 호송한 뒤 귀로에 해도의 잘못을 바로잡기 위하여 우리나라의 서해안 일대를 탐사하러 찾아왔다.

 

이 함대에는 수병들 이외에도 흑인 11명, 중국인 1명, 장범장(掌帆長) 로이(Roy)씨의 부인까지 타고 있었는데, 중국인은 한문을 몰랐던 탓으로 조선 관원들이 써보이는 문정(問情)도 알지를 못하니, 모든 의사소통은 손짓으로 진행되었다.

 

당시 마량진(馬梁鎭)의 첨사(僉使)¹ 조견복(趙犬福)은 서장관으로 하여금 한문으로 문정 내용을 쓰게 하여 맥스웰(Maxwell) 함장에게 전해주었다. 한문을 해득(解得)할 수가 없는 맥스웰 함장은 종이쪽지에 “I do not understand one word that you say.”라고 적어 보였는데 이 말을 해독할 사람이 없었다. 홀 함장은 조견복이 적어보인 문정 내용을 훗날 광동(廣東)으로 가지고 가서 그곳에서 포교 중이던 영국 선교사 모리슨(Dr. Robert Morrison: 1782-1834)에게 보였더니, “어느 나라 사람인가? 배 안에 한문을 알며 교섭을 맡아 볼만한 문장가는 없느냐?”는 뜻이라고 번역해 주었다.

 

여러 섬이나 육지의 주민들은 영국 선원들이 선교나 통상을 위한 문호개방을 요구하러 간 것이 아니었는데도 상륙을 막고 목이 달아난다는 시늉을 지으면서 속히 물러가기를 종용하였다. 그 가운데서도 서로 간의 교류는 이루어졌는데, 비인(庇仁) 현감 이승렬(李升烈)은 그 해 9월 15일에 라이라 호를 방문하여 선장실에 놓여있는 지구의(地球儀)를 돌려보기도 하고, 안경, 책 등을 만져보더니 “대영백과사전” 중의 한권을 달라고 했지만 거절당하고 다른 책 3권을 받아 갖게 되었으나 전자(篆字)²도 국문도 아닌 영문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9월 8일에는 홀 함장이 아녀자들이 모여 있는 골짜기에 접근하려 할 때, 한 주민이 홀 함장의 팔을 꽉 잡아 눌렀더니 홀 함장이 “Patience, Sir!(노형 참으시오!)”라고 외치자 주민들은 그 말을 따라서 한참 동안 “Patience, Sir!”만 연발했다. 그 날은 어두워질 때까지 홀 함장이 주민들에게 언덕 위에서 영어 단어를 가르쳐 주었는데 주민들은 즐겨 배웠던 모양이다.

 

한편, 홀 함장은 28개의 우리말 단어를 채집하였으며, 홀 함장은 “영국인은 한국의 토박이 발음을 내기가 어려웠으나, 한국인들은 영어 발음을 곧잘 흉내 내더라.”고 술회하였다.

 

홀 함장 일행이 1816년 9월 1일부터 9월 10일까지의 10일 동안 순방했던 서해안의 여러 지역 중에서도, 9월 8일 영어가 전수된 신안 앞바다의 섬에는 “한국영어전습지”라는 기념비라도 세울 만한 곳이라고 여겨진다.

 

홀 함장의 일행은 류큐(琉球)³에 체류하는 동안에도 그곳에 영학(英學)의 단서를 열어주었다.

 

일행은 귀국하던 도중 가스파(Gaspa) 해협에서 알세스트 호가 좌초 침몰되었으나 바타비아(Batavia) 정부의 도움으로 구조되었다. 홀 함장 일행은 귀국 도중 1817년 8월 11일에 세인트 핼레나(St. Helena) 섬에 유폐 중인 나폴레옹(Napoleon)을 만나서 조선과 류큐의 풍물화를 보이면서 설명하였다. 나폴레옹은 조선의 갓을 쓴 노인의 모자와 흰 수염, 긴 담뱃대 등에 흥미를 보였으며, 류큐에는 무기가 없다는 말을 듣자, “태양이 비치는 곳에 전쟁을 안 하는 나라가 있다니 이상한 일이로고.”하며 의아해 했다.

 

한국인에게 처음으로 영어를 가르친 홀 함장은 1788년 12월 31일 스코틀랜드의 수도인 에든버러의 명문 홀(Hall) 가문에서 태어난 사람이다. 그는 에든버러 왕립협회의 총재로 있으면서 지질학과 건축학사의 권위자였던 제임스 홀(James Hall: 1761-18320 경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해군에 입대하여 1814년에 대포 10문이 탑재된 라이라 호의 함장이 된지 2년 만에 한국을 다녀갔던 것이며, 이듬해인 1817년 10월 극동 항해에서 귀국하여 그 해 11월에 대령 함장으로 진급한 뒤 2년 동안 대륙 방면에서 복무하였다. 1820년에는 콘웨이(Conway) 호의 함장이 되었고, 2년간 남미 연안에서 파견 근무를 하면서 각지에서 실시한 관측 결과를 철학 논문집에 발표하였다. 1822년 멕시코 서해안에서 귀국하여 이듬해에 20년간의 해군 생화에서 퇴임한 뒤 1824년 봄에는 스페인 주재 영국 영사 헌터(John Hunter) 경의 따님인 마가렛(Margaret)양과 결혼하였고, 그 뒤로는 그가 즐기는 여행과 과학 연구로 여생을 보내다가 1842년에 정신이상을 일으켜 2년 동안의 입원 생활 끝에 1844년 9월 11일 1남 1녀를 남긴 별세하였다. 그는 동향의 시인 스콧(Walter Scott: 1771-1832)경과도 교분이 두터웠다.

==========================================

¹ 첨절제사(僉節制使)

² 한자의 한 서체(書體)

³ 류큐(琉球)는 현재 일본의 오키나와 지역을 말한다.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의 옛이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