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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기의 영어이야기--대미 문호개방 이전의 영학

리첫 2018. 2. 3. 15:15

개화기의 영어이야기--대미 문호개방 이전의 영학

 

신미양요 때의 의사소통

 

서세(西勢)의 동점(東漸)을 지연시키게 된 것은 문호 개방이 되면 서양의 사교(邪敎)에 의하여 유교 윤리의 기강이 붕괴될 것을 우려한 나머지 쇄국주의를 고수한 때문이었다. 쇄국정책의 상징은 강화도에서 프랑스군과 싸웠던 병인년(1806년)에 세우기 시작해서 신미년(1811)에 완공한 척화비로 나타나 있다. 이렇게 영어 사용국에 대한 문호 개방이 지연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영어의 전습까지 지연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1866년 대동강에서 20명의 선원이 몰살된 제너럴셔먼 호 사건 때는 조선말을 조금 할 줄 알았던 미국인 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 목사가 통역을 맡았다.* 이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기 위하여 1867년 1월 11일 미국 해군 대령 슈펠트(Robert W. Shufeldt) 제독이 이끄는 와추셋(Wachusett)호가 황해도 장연현에 왔을 때는 청국인 우문태(于文泰)와 중윤부(仲允付)가 통역을 맡아 보았고, 두 번째의 진상조사에 나섰던 미국 해군 중령 페비거(John C. Febiger) 함장이 셰난도(Shenandoah)호를 이끌고 평안남도의 삼화현에 왔을 때는 한문 서한과 필담(筆談)으로 의사가 소통되었다.

 

1871년 청국주재 미국공사관의 로우(E. E. Low) 공사가 조선과의 통상외교 담판을 위하여 아시아 함대 사령관 로저스(J. Rodgers) 소장이 이끄는 군함 콜로라도(Colorado), 모노카시(Monocacy), 폴라스(Polas), 아슈렛(Ashuelet), 베니시아(Benicia), 알라스카(Alaska)호 등에 승선한 수병 1,000여명과 함께 강화도에 왔을 때는 북경 주재 미국 공사관의 부서기관 서리였던 카울즈(John P. Cowles)를 통역으로 삼았는데, 화량(花梁) 첨사(僉使)가 그에게 내방 목적을 묻고자 하였으나 언어장애로 의사불통이 되고 말았으며 로우 공사가 조정에 보내는 영문 서한을 받은 부평 도호부사 이기조(李基祖)는 어느 나라 말인지 알 수가 없다고 되돌려 주고 말았다.

 

당시 조정에서 알고 있던 미국 상식이란 “미리견(美利堅)에는 부락이 있었을 뿐인데 중간에 화성돈(Washington)이란 이가 성시(城市)를 개척하고 외국인들과 서로 교섭하게 되었다.”라는 것과 “화기국(花旗國)** 상감은 귀신을 무서워해서 귀신이 꺼리는 흰 빛깔을 칠한 백아의 집에서 사노라.”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콜로라도 함상에 올라간 3명의 문정관(問情官)들은 드루(Drew) 서기관 및 청국인과 중국어로 의견을 교환하였는데, 맥주와 음식 등을 대접받는 한편 배안을 두루 구경하면서 사진을 찍는데 응해 주기도 하고, 한 문정관은 유리병이 탐이 나서 빈 맥주병을 포함한 맥주 열병과 미국 신문인 “토요신문(Every Saturday)”과 “보스톤 신문(Boston Illustrated Newspaper)”*** 그리고 담뱃대 등을 가슴팍에 한아름 안고 사진사가 웃으라는 요구에 따라 쓴 웃음을 머금은 채 사진을 찍었다. 이 문정관은 가졌던 미국 신문은 조선인이 받아든 최초의 영자 신문이었으나 불행히도 영어를 몰랐던 탓으로 기사 내용을 알 도리가 없었다.

 

한편, 몇 사람의 천주교 신자들은 야영 중인 미군에게 접근하여 서투른 프랑스 말로 자신들은 천주교 신자라고 하면서 조불전쟁 때 관여했던 프랑스 신부들의 안부를 묻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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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문환(吳文煥)의 “토마스 목사전”(1928) 참조

 

** 화기국은 미국을 말하는 것으로, 게일 박사가 편찬한 “한영자전: A Korean-English Dictionary"에는 The land of the flower flag-the United States라고 해석되어 있다.

 

*** Illustrated newspaper는 사진과 삽화가 많이 실리는 형식의 신문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