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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기의 영어이야기--일본의 영학 동정

리첫 2018. 2. 7. 17:37

개화기의 영어이야기--일본의 영학 동정

 

쇄국시대라 할지라도 조선 정부는 해외 정세에 아주 어두웠던 것만은 아니었다. 일본의 에도바쿠후(江戶幕府)가 런던에 몇 명의 유학생을 파견하였는데 모두가 영어에 능통하다는 것과 독리선무장군(督理船務將軍) 나카하마(中濱萬次郞)가 달포전에 청국의 상해(上海)에 화륜선을 건조하러 갔었는데 그의 지혜가 영민하다는 것까지도 소상하게 알고 있었다.

 

당시 일본에서는 1863년 죠슈번(長州藩)*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등을 영국에 유학시킨 것을 비롯하여, 1865년에는 가고시마번(鹿兒島藩)에서 모리 유레이(森有禮) 등을 영국에 유학시켰으며 1866년에는 정부 차원에서 나카무라(中村正直) 등 14명을 영국에 유학시킨 일이 있다. 그 중에서 나카무라는 ‘서양은 단순한 물질문명의 나라가 아니라 그들의 부강은 백성들의 자조정신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깊이 깨달았다. 그는 귀국할 때 영국인 친구들로부터 선물 받은 스마일스(Samuel Smiles)의 저서 “자조론(Self-Help)”(1859)이야말로 나라를 부강케 하는 자조정신이 담긴 명저라는 생각에서 1871년에 “서국입지편(西國立志編)”이라는 이름으로 출판하였다. 그가 1873년에 설립한 도진샤(同人社)에는 윤치호(尹致昊)가 유학하게 되어 그 감화를 받았으며 최남선(崔南善)도 1918년에 “자조론(自助論)”의 상편을 번역 발행하였다.

 

한편 나카하마는 15세 때인 1841년 도사(土佐)의 어촌에서 고기잡이에 나갔다가 폭풍을 만나 7일 동안의 표류 끝에 외딴 섬에서 새를 잡아먹으면서 반년이나 연명하다가 1841년 6월 27일 미국인 위트필드(William Whifield) 선장이 거느리는 고래잡이배에 구조되어 미국에서 보통교육과 항해술 등을 배운 뒤 1851년 귀국하였다. 그는 1853년에는 에도 정부에 등용되어 항해, 측량, 조선(造船) 등의 일을 맡아 보았으며 해밀턴 메서드(Hamilton Method)가 엮은 “영미대화첩경”(1859)을 발행하기도 하면서 서양 문명을 일본에 이식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뒤에서 살펴보겠거니와 우리나라에서 발행된 영어 자습서도 해밀턴 메서드에 의하여 편집된 것이 압도적으로 많았으며 그러한 경향은 해방 뒤까지 이어졌다.

====================================================================*  번(藩)은 에도시대 때부터 쓰이던 말로 메이지 유신 이후로는 현(縣)이라는 명칭으로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