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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기의 영어이야기--청국 유학생들의 영어학습<2>

리첫 2018. 2. 19. 15:08

개화기의 영어이야기--청국 유학생들의 영어학습<2>

 

대부분의 조선 유학생들이 이 수사학당에 입학하여 어학을 배우겠다는 바람에 김윤식은 오(吳) 관찰과 협의한 끝에 1881년 12월 10일 오후 2시 학도 7명을 거느리고 수사국(水師局)을 방문하였다. 복건성 태생으로서 중서학당 출신인 허조기(許兆基)와 조렴정(曺廉正)이 조선 학도들을 차례로 불러 들여서 시험을 치렀다. 맨 먼저 조한근(趙漢根)이 불려 들어갔는데, 허 선생이 먼저 발음하는 대로 따라서 발음하게 되면 발음의 맑고 흐림을 분간하고, ‘좌전(左傳)’을 내주어 한문을 읽혀본 다음 논문을 지을 수 있는가를 물어서 합당하면 뽑고 그렇지 못하면 퇴짜를 놨다. 시험 결과 조한근, 고영철(高永喆), 김광련(金光練), 이희민(李熙民), 등이 합격되어 그 달 17일 7시부터 입학이 되고 나머지 3명의 학생들은 다른 학당이나 공창(工廠)으로 보내졌다.

 

그런데 이들 유학생 중에서 조한근은 이듬해 2월 1일에 글을 쓰고 외우고 재간이 부족하다는 것을 진정한 뒤 자퇴하면서 전기창으로 옮겼으며 그곳에서 그의 총명한 적성을 나타냈다. 또한 김광련과 이희민도 2월 11일 이전에 자퇴하면서 김광련은 동모창(銅冒廠)으로 옮기고 이희민은 입이 둔하다면서 화학창(化學廠)으로 옮겼다.

 

그러나 고영철만은 끝까지 남아서 한문이나 양창대(洋槍隊) 공부는 하지를 않고 오로지 영어-영문만을 배웠으며 학당 안에서 매우 재간이 있다는 평판을 듣게 되었다. 그가 수사학당에서 영어를 배운 기간은 1881년 12월부터 이듬해 7월까지의 8개월에 불과하였고, 학습열에 비해서 그 성과는 만족스럽지 못하였다. 그는 귀국한 뒤, 1883년 8월 3일 서울 재동에 세워진 동문학교*의 주사(主事)에 임명되었으며, 민영익(閔泳翊)을 대표로 하는 대미 보빙사절단으로 선발되어 도미했다. 그러나 영어 통역을 감당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외국인 통역관과 비서가 따로 초빙되었다.

 

어학이란 짧은 시일 안에 완성할 수가 없는 것이고 10년 동안 배워도 영어 편지 한 장을 쓰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지만, 청국인들은 외국어 학습의 최저 소요 기간을 5년으로 잡고 있었는데 조선 유학생의 유학 기간이 2년에 불과하였으니 계획 자체부터 차질이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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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에 그 자리에 창덕여고가 세워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