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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기의 영어이야기--청국 유학생들의 영어학습<3>

리첫 2018. 3. 8. 13:23

개화기의 영어이야기--청국 유학생들의 영어학습<3>

 

1881년 12월 8일 김윤식이 기기국(機器局)의 총판(總辦)인 반매원(潘梅園) 관찰을 만났을 때 반매원은 “서양인이 그린 조병기계는 중국인도 배우기 어려우니 조선 학도가 총명하다 하더라도 배우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기계를 설치하려면 돈이 많이들 터인데 조선의 재력으로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라고 하면서 대포, 화약, 어학 등이나 잘 배우고 돌아가면 요긴하게 쓰기에 족할 것이라고 권유한 바도 있었다. 1882년 2월 28일 김윤식이 동국을 방문했을 때 반매원은 다시 “어학만은 5년이 걸려야 배웁니다. 조선은 이미 외국과 통상을 하고 있으니 만약 서양 글과 말을 아는 사람이 없다면 어찌 의사소통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중국도 처음으로 각국과 통상을 할 때는 서양 글을 몰라서 손해를 입은 일이 많았습니다. 조선도 이와 같은 경우를 당할 터이니 어학만은 정통하여야 됩니다. 도중에 끊어버린다면 아무런 소용도 없으니 설사 유학생들과 사신들이 귀환하더라도 어학생 몇 사람만은 남겨두게 하여도 무방하니 기어이 어학을 완성하고 귀국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라는 깨우침을 주기도 하였다.

 

고영철은 그 뒤 지방관도 지낸 바 있는데 그의 셋째 아들인 고희동(高羲東)도 어학에 뜻을 품고 1889년에 관립한성법어학교*에 들어가서 1903년까지 마르텔(Emile Martel)로부터 프랑스 말을 배우고, 1904년부터 궁내부 주사로 봉직하였다. 그러나 제2차 한일협약이 체결된 후 비통한 울분을 그림과 술로나 풀어보리라는 생각에서 그림 공부로 전향하여 도쿄로 유학을 떠났다. 귀국한 뒤에는 중앙고보의 미술 교사를 하며 후진 양성에 힘썼다.

 

한편 수뢰학당(水雷學堂)에 입학한 학도 최규한(崔圭漢)과 공장 박영조(朴永祚)도 영어 선생 증자안(曾子安), 정우징(鄭宇澄), 양재만(良在萬)등으로부터 영어를 배웠다. 당년 18세였던 박영조는 인물이 준수하고 장래성이 있다는 평판을 들었는데, 나이가 어리고 공부는 비교적 잘한 모양이지만 재간이 둔하다는 평도 있었다. 최규한은 재간이 부족하여 1882년 3월 6일 귀국하고 말았다.

 

이들의 교육을 자청하고 나섰던 수사학당의 영어 교사 엄종광(嚴宗光)은 당년 31세였는데, 북건성 태생으로서 15~6세에 학당에 들어가서 24~5세에 학업을 마친 뒤 영국 유학을 하고 1878년 귀국한 인물이었다. 당시의 학칙에 따르면 아침 8시에 학당에 들어가서 영어를 배우다가 정오에는 흩어져서 점심을 들고 오후 2시에 한문을 배우며 밤 10시에 잠을 자게 되어 있었다. 이밖에 기기, 동모, 강수(䃨水), 화약, 목양(木樣), 전기, 화학 등의 각 창(廠)에서도 영어를 조금씩 배웠다. 당시 청국에서의 영어 학습열은 대단한 것이어서 나이가 70세나 된 서태후(西太后)도 영어를 배웠다.

 

김윤식의 아들 유문(裕問)도 계산유년학교, 보흥학교, 중앙학교, 청년학교 영어전습과 등을 다니다가 기미년 3월 29일 민심선동죄로 징역 1년 반의 판결을 선고받고 8월 2일 집행유예 2년으로 석방된 후 1921년 9월 9일 중국으로 유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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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서 법어(法語)는 프랑스어를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