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유람단원으로 일본 유학
프랑스와 미국의 함대를 물리친 조선왕조는 일본 군함 운양호 사건으로 1876년 강화도에서 조-일 수호조약을 체결하고 1881년에는 서양의 문물제도를 먼저 받아들인 일본의 개화상을 시찰하기 위한 신사유람단을 보내게 되었다. 이들 12신사는 각각 두 사람의 수행원과 통사 1명, 하인 1명을 거느리게 되었는데, 조사(朝士) 어윤중(魚允中)의 수행원으로는 유길준(兪吉濬), 류정수(柳定秀), 당시 16세의 윤치호(尹致昊:1865.1.3-1945.12.6), 김양한(金亮漢)이 뽑혔다.
일행은 음력 4월 10일 부산에서 일본 상선 안네이마루(安寧丸) 편으로 도일하여 74일 동안 일본의 각 분야를 시찰하고, 그해 가을 유람단의 귀국 무렵, 유길준은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가 세운 게이오(慶應)의숙(義塾)에 윤치호는 나카무라가 세운 도오진샤(同人社)에 1882년 입학하여 신문명을 받아들이려고 일본어를 배웠다.
영어 공부로 전향
윤치호는 조선을 떠나기 전인 1880년 김홍집(金弘集) 수신사와 함께 일본을 다녀온 부친 윤웅렬(尹雄烈)의 소개로 주일 영국 공사관의 서기관 새토우(Ernest Mason Satow)를 은밀히 만났는데, 영어를 배우라면서 자기가 가르쳐 주겠다기에 혼자서 결정하지 못한 채 돌아와서 어른들과 의논한 즉, 홍영식(洪英植)은 “영어를 배우다니, 그것은 국금(國禁)을 범하는 것이니 절대로 안 될 일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어윤중이 조용히 불러서 “걱정 말고 비밀리에 배우라.”하기에 배울 기회만을 엿보다가 1882년 봄에 알게 된 동경대학의 법과 학생 미야오카(宮岡恒次郞)의 소개로 동경대학의 철학 교수로 있던 페널로사(Ernest Francisco Fenollosa:1853-1908)의 첫 번째 부인 밀레(Lizzie Goodhue Millet)여사에게 안내되어 그 집에서 처음으로 ABC를 배웠다.
메사추세츠 주 세일럼(Salem)시 명문가 출신의 금발미녀 밀레와 페널로사의 사랑은 1867년 여름부터 싹텄으나 페널로사가 스페인 이민의 자손인데다가 성격 차이 때문에 한때 파탄되었었다. 그러다가 하버드 대학의 우등 졸업생인 페널로사가 도쿄 대학의 동물학 교수로 있던 모스(Edward Sylvester Morse:1838-1925)의 천거로 1878년 도쿄 대학에 초청받게 되었다. 페널로사는 바로 하버드로 밀레를 찾아가서 구혼했고 그해 6월 세일럼에서 결혼하여 함께 동경으로 떠났었다. 그러나 사치스러운 밀레와 뜻이 맞지 않았던 페널로사는 1890년 일본에서 귀국한 후 1남1녀를 남긴 채 이혼하였다. 그 후 보스톤 미술관의 조수로 있던 기혼녀 매리(Mary McNeil Scott)와 재혼했다가 딸 하나를 남긴 채 1908년 9월21일 런던에서 심장마비로 객사했다. 그가 남긴 “중국 및 일본의 미술사(Epoch of Chinese and Japanese Art)”(1912)의 제4장에는 “상고시대의 조선과 일본의 불교미술”이 수록되어 있다.
모스의 “일본에서의 일상(Japan Day by Day)”<1917>에는 윤웅렬, 윤치호 미야오카에 대한 기록이 산견되거니와 그는 세일럼에서 유길준의 학업을 도와준 사람이었다.
윤치호는 미야오카의 소개로 영학자인 간다(神田乃武:1857-1923)로부터 약 2주일 동안 교과서 없이 구두로 영어를 배우다가 임오군란 때문에 중지되었다. 간다는 화란어 학자였던 간다 고오헤이(神田孝平)의 양자로서 1871년 도미하여 엠허스트(Amherst) 대학을 마치고 1879년 귀국한 뒤 동경제국대학과 동경고등상업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쳤는데 1898년에는 남작이 되고 중의원 의원이 되었다. 그는 체임벌린(B.H. Chamberlain)의 제자로서 한성일어학교에 고빙된 오카쿠라(岡倉由三郞:1868-1936)처럼 예스퍼슨(Jesperson) 교수법 원리의 영향을 받은 영학자로서 그가 지은 “킹스 크라운 리더스(The King's Crown Readers)”<1926> 등은 조선총독부의 검인정 교과서로 채택되었다. 간다는 자기보다 1년 늦게 일곱 살의 소녀로 도미 유학하여 1900년에 쓰다영학숙(津田英學塾)을 세운 쓰다 우메코(津田梅子:1864-1929)에게 청혼하였으나 독신주의자라 거절당했다.
1924년 쓰다영학숙을 최초로 졸업한 박승호(朴承浩)는 극태(極態) 최승만(崔承萬)의 부인이 되어 동아일보 기자로 일했고, 최국경(崔國卿)은 숙명고녀, 임효정(林孝貞)은 경성여상에서 영어 교사로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