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가 학교를 불태우다<2>
1877년에 아키타(秋田) 현(縣)의 교육상황을 시찰한 문부성 관리의 보고서를 요즘 쓰는 말로 번역하면, 대개 이러하다. “촌락의 학생들은 거의 대부분이 가난해서, 누더기 옷을 입고 나무 마루에 엎드려 석판(당시는 종이가 귀해서 지금처럼 공책 같은 것은 없고, 석판이라는 나무틀을 붙인 얇은 돌판에 석필이라는 돌로 선생님이 가르치는 것을 필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도 문방구가 모자라는 제3세계 지역 등에서는 이것을 사용하는 곳이 있다.) 대신 오동나무 잎이나 목편을 상요하고 있다. 산과 들을 넘어 먼 거리를 통학하는 학생도 많다. 그런데도 이처럼 가난한 마부나 나무꾼 등의 자녀에게 로마 숫자 쓰는 법을 가르치는 것처럼 쓸데없는 교육을 시행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는 해만 많고 이익은 적다.”라고 관리는 보고했다.
그렇지만 아이들은 집에서 논일을 하는 것보다 학교에 가서 친구들과 노는 편이 좋았을지도 모른다. 반대로 부모 입장에서 보면, 귀중한 일손인 아이들을 빼앗긴데다가 수업료도 내야하고, 실생활에 도움도 안 되는 로마 숫자나 레몬 색 등을 배우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래서 메이지 중기까지, 혹은 지방이나 가정에 따라서는 그 이후에도, 부모가 아이들을 학교에 가지 못하게 취학거부나 교육비 지불을 거부하는 일이 잇달았다. 메이지 초기 농민 봉기나 폭동처럼, 부모가 촌의 사무소와 학교에 불을 지른 경우도 적지 않았다. 1876년 12월 미에(三重) 현(縣)에서 일어난 폭동으로 40개 정도의 소학교와 학구 감독 관리의 집이 불타 버린 것이다.
따라서 메이지시대 전반의 취학률은 줄곧 낮았다. 대개 30퍼센트 전반에서 40퍼센트 정도였다. 더욱이 이것도 지방 관리들이 실제보다 부풀려서 보고한 경우가 많았고, 서류상으로 소학교 재적자 중 실제로 학교에 출석하고 있는 학생의 비율은 70퍼센트가 될까 말까였다. 더구나 학교에 가도 반년이나 1년 정도 다니다 중퇴하거나 낙제하는 학생이 많았다. 그래서 서류상으로 소학교에 재적하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어도, 그중 절반 이상이 지금으로 말하면 1학년생이었다. 당시 4년제였던 하등소학교(소학교 학제는 하등과 상등을 합쳐 8년제였음.)의 졸업률은 20퍼센트 정도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