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화기 영어이야기--영학자 좌옹 윤치호<3>
그가 요코하마에서 ‘프라이머’ 제1권을 겨우 떼었던 1883년 4월19일 조선 주재 초대 미국 공사로 부임하는 푸트(Lucius H. Foote)가 요코하마에 도착한 뒤 동경에 들러서 조선일 영어 통역관을 구하게 되자, 윤치호 밖에 없다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모스 박사가 “코리언 인터뷰”에 쓴 글에도 동경에 있을 때 영어를 아는 조선인이 없어서 일본인 통역의 중계로 대화하였다고 적혀 있다.) 1883년 4월 24일 윤치호는 그랜드 여관에서 이노우에(井上馨) 외무경과 후쿠자와(福澤諭吉)가 통역으로 따라 가라고 계속 종용하는 강권에 못 이겨 빈약한 영어 실력이나마 응낙하게 되었다.
미국 공사 내외와 일본인 영어 통역관 사이토(齋藤修一郞)와 함께 1883년 4눵 26일 요코하마에서 출발하여 나가사키(長崎)까지 겐카이마루(玄海丸)편으로 가서 5월 8일 모노카시(Monocacy)호를 갈아타고 13일 제물포에 내린 뒤 서울로 올라왔다. 정동의 미국 공사관에 있으면서 20일 공사와 함께 고종을 뵙고 1년 반 가량 통역관으로 봉직하였는데, 월급은 미국 공사관에서 멕시코 달러로 50원을 받고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주사로서 썩은 쌀 한 섬을 받았다. 처음 3개월 동안은 사이토가 미국 공사의 말을 받아서 윤치호에게 전해주면 그것을 다시 우리 말로 옮기는 이중 통역을 하였다.
이시카와(石川) 현의 후쿠이(福井)에서 번사(藩士) 출신의 안과 의사를 아버지로 하여 1855년 7월 15일 태어난 사이토는 조실부모하고 1869년에 누마즈(沼津) 병학교(兵學校)의 학생으로 있다가 번(藩)의 공진생(貢進生)으로 대학남교(大學南校)에서 수재 교육을 받은 제1회 졸업생이었다. 1875년에는 문부성(文部省)이 동경 가이세이(開成) 학교에서 뽑은 11명의 제1회 해외유학생으로서 하버드와 예일대학을 마치고 돌아와 1880년에 외무성의 서기관으로 있다가 이노우에의 배려로 푸트 공사를 따라 나왔던 것이었다. 그는 1884년에 전권대사로 특파되어 조선에 나온 이노우에를 수행하여 농상공 부문의 개혁안을 기초한 일도 있었고, 1894년에는 조선 의정부의 고문으로 있다가 1910년에 동경 미곡거래소의 이사장을 지내고 신문계에 종사하다가 1910년 5월 5일 폐렴으로 별세하였다.
윤치호는 1930년에 당시의 일을, “안 혼자서 되나 안 되나 통역을 하기로 힘스니 그럭저럭 말은 통하였지요. 그때 어떻게 통력을 했었는지 지금도 생각하면 우습지마는 실상 그렇게 어려운 국서도 없었으므로 실패는 없었던 듯하오.”라고 술회하였다. 당시의 국서라면 “미안(美案)”에 윤치호의 번역문이 보이거니와 “좌옹 윤치호 선생 약전(佐翁尹致昊先生略傳)”에도 조선의 정계를 푸트 공사에게 개진한 영문과, 보빙사 귀국 후에 푸트 공사와 고종과의 대담을 필담으로 도모한 한문이 수록되어 있다.
좌옹은 1884년 3월 14일 밤에 박제경(* 조선정감<朝鮮政鑑>의 저자)으로부터 영어책을 받았으며, 3월 23일에는 박제경에게 “화영자전(和英字典)”을 보냈다. 4월 21일에는 박제경을 찾아가서 “영화자전(英華字典)”과 미국제 “대성자전(大成字典)” 두 권을 동정삼아 사준 일도 있었다. 그는 공사관에서의 1년 반 동안 영어공부에만 전념하여 회화는 그런대로 통하였으나 문법이 서툴러서 새로 배워야 할 형편이었다. 우리나라의 영학자들은 거의 한글 연구에 관심을 경주하거나 영문법의 체계를 한글 문법 연구에 응용한 것이 특색이었는데, 서재필(徐載弼) 박사, 유길준(兪吉濬), 남궁억(南宮檍), 이능화(李能和), 주시경(周時經), 이희승(李熙昇) 박사, 김희상(金熙祥), 김선기(金善琪), 정인섭(鄭寅燮) 박사 등의 경우처럼 윤치호도 한글 보급과 철자법에 관심을 기울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