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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사회의 성립<1>

리첫 2018. 5. 15. 11:29

학력사회의 성립<1>

 

이런 상황이 변하기 시작한 때는 1887년(메이지 20) 중반을 지나면서부터다. 먼저 1895년(메이지(28)에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리를 해서 청나라로부터 당시 일본 국가재정의 4년치 이상에 상당하는 배상금을 가로챌 수가 있었다. 이 돈으로 교육기금이 만들어지고 국고 보조급도 늘어, 1900년에는 소학교 수업료가 폐지되었다. 청일전쟁의 배상금에서 교육기금이 할당된 것은, 국민을 교육시키는 것이 전쟁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실제 전쟁을 해보고 깨달았기 때문이다. 읽기, 쓰기나 산수를 할 수 없는 병사 따위는 근대 전쟁에서는 쓸모가 없다. 병사들이 명령문이나 병기의 설명서도 못 읽는다든지, ‘백 발 쏴!’라는 명령을 받아도 백까지 셀 수 없다면, 전쟁하는 데도 상당히 고생한다는 것을 잘 알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대부터 일본의 산업 또한 발달하기 시작했다. 그때가지는 학교에서 읽기, 쓰기나 산수를 배웠더라도, 농민의 아이는 역시 농민이 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직업이 다양하지 않았다. 그러나 산업의 발당이 궤도에 오르자, 공장과 회사가 많이 생겨서 직장이 늘어났다. 직장에 취직하기 위해서는 병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교육이 필요하다. 서류를 읽고 쓸 수 없는 회사원이나 기계의 매뉴얼을 읽지 못하는 공장의 노동자나 수를 계산할 수 없는 종업원은 근대 산업에서는 필요 없다. 그래서 기업은 학교를 졸업한 사람만을 고용하고 싶어 한다. 한마디로 학교에 가면 나중에 돈을 많이 버는 직업을 가질 수 있다는 것. 그렇게 되면 부모들도 아이를 학교에 보낼 명분이 생긴다.

 

메이지 중엽쯤에 이르자 ‘월급쟁이’라는 말이 생겼다. 역사학자인 기타 사다키치(喜田貞吉)의 <환갑기념 60년의 회고>라는 책에서 회상하고 있는 부분을 잠깐 소개해보겠다.

 

“------내 중학교 시절, 월급쟁이는 굉장한 것이었다. 여하튼 병이 나서 쉬어도, 일요일이라도, 혹은 여름휴가에도 일정한 급료를 받으며, 일용직 노동자나 농민과는 도저히 비교도 안 되는 수입이 있고, 세간에서는 존경받으며, 뭇사람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는 직업이었다.”


“최하급으로서 우선 소학교 교원을 손꼽을 수 있다. 그때 사범학교 졸업생의 초임이 도쿠시마현(德島縣)에서 6엔------ 그래도 시민이나 장인(기술자)보다 훨씬 좋다. 중등학교 선생님이 되면 통례적으로 15~30엔. 더구나 법학사 아무개 씨가 교장으로서 월급 60엔, 고등사범 출신의 아무개 씨가 교감으로서 월급 40엔----- 당시 나같은 사람은 한 달에 불과 1엔 50전의 식비로 생활할 수 있었으므로, 전자는 40명, 후자는 36~37명을 부양할 수 있었던 것이다. 현령(당시의 현지사로 우리나라의 도지사)이 되면 더욱 엄청나서 월급은 실로 250엔------ 고임금자에 대한 세간의 존경도 역시 대단하고, 따라서 위력도 굉장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