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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기 영어이야기--영학자 좌옹 윤치호<5>

리첫 2018. 5. 29. 16:10

개화기 영어이야기-- 영학자 좌옹 윤치호


윤치호의  어학 재능

 

예로부터 최세진(崔世珍), 신숙주(申叔舟), 정북창(鄭北窓) 등은 외국어 즉, 중국어 학자로 유명하였거니와 좌옹도 6개 국어에 통달하였다던 김대건 신부 못지 않은 어학의 재능이 있었으니 춘원 이광수는 이렇게 적고 있다.

 

“저이가 8국말을 한 대”하고 어느 동무가 가장 잘 아는 듯이 경탄의 어를 발하였다. 그 중에도 영어는 양인보다도 더 잘한다고 칭찬하는 말을 들었다. 씨(氏)는 과연 어학에 특별한 천재가 있는 이다. 8국어는 무엇 무엇을 가리킨 것인지 모르지마는 필자가 아는 한에서도 영어는 갑신년 김옥균(金玉均) 혁명 때부터 대군주와 영, 미 공사 사이에 통역을 하였다 하고, 또 미국 에모리 대학 출신이니까 말할 것도 없지마는 중국 여자를 부인으로 삼을 만큼(* 김영희<1999>의 ‘좌옹 윤치호 선생 약전’을 보면, 좌옹은 상해 중서학원에서 교편생활을 할 때, 알렌 교장의 소개로 맥티어 여학교 졸업생인 중국인 마노라 양과 결혼하였고, 마부인은 좌옹과 11년간의 결혼생활 후 1905년 2월 15일 서울의 세브란스 병실에서 별세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본 장에 이어지는 자료에는 윤치호의 영어 표현들을 엿보기 위하여 영문 일기 원문들을 몇가지 발췌하여 실었는데, 1943년 4월 일기에서도 병상의 부인이 임종하는 모습을 적고 있다. 이 부인은 윤치호가 두 번째로 결혼한 백매려<白梅麗>이다. 두 번째 결혼 날짜에 관해서 ‘좌옹 윤치호 약전’에는 1907년 3월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영문일기에는 1905년에 결혼하였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어 기록상의 차이가 있다.) 또 혹은 그리하였기 때문에 한어는 말할 것도 없고, 일어는 본래도 잘하였으나 총독 암살 음모사건으로 재판소에 끌리어 다니는 동안에 더욱 숙달하였고, 법어는 동 사건으로 대구감옥에 재감한 동안에 통하였다 하니 조선어를 제하고 영, 일, 한, 법 4개 국어를 능통하는 것은 확실하다. (중략). 씨는 일찍 원산 감리 적에 서양인을 붙들어다가 볼기를 때리었다 하여 원산인은 지금까지 ‘경골감리(硬骨監理)’의 칭송을 하고 있다. (후략).

 

좌옹은 학부의 협판으로 있던 1896년에 제정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민영환(閔泳煥)의 수행원으로 참석하여 아라사(러시아)말 통역관 김도일을 제쳐놓고 황제와 영어로 대담을 나누었으며 귀국길에는 파리에서 3개월 동안 프랑스 말을 배워왔기 때문에 덕원 감리로 있을 때 안변읍 주변의 금피라는 고장에서 행패가 자심하였던 블라두(Thomas Bouladoux) 신부의 독죄를 요청하는 불어 항의문을 주한 프랑스 공사에게 띄울 수가 있었으며, 1922년 송도고보의 교장으로 있을 대는 불어판 ‘성경’도 읽게 되었던 것이다.

 

서재필(徐載弼: Philip Jaison) 박사가 창간한 영자 신문 ‘인디펜던트(The Independent)’(* 인디펜던트는 서재필이 창간한 국내 최초의 영어신문이다. 이 신문은 1896년 한글 전용 ‘독립신문’과 같은 지면에 붙여서 발행된 영문판으로 창간되었다가 1897년 1월부터 한글판과 영문판이 분리되었다. 홍순일 등<2003>의 ‘한국영어신문사’ 34~60쪽 참조)를 인수 발행한 좌옹은 최초 최고봉의 영학자였으며, 그가 남긴 영문 일기는 그의 영학편력(英學遍歷)이자 한국 영학사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그 사료적 가치는 매우 높은 것이다.

 

윤치호의 영어 배우기

 

중앙일보 2003년 1월 30일 자에는 ‘백년전 거울로 오늘을 보다’라는 칼럼에서 박노자, 허동현 두 교수가 현대 한국의 ‘영어 배우기 열풍’에 비추어 본 개화기 근대사의 ‘영어 배우기’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아래는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 국립대 교수가 쓴 ‘윤치호의 영어 배우기’ 중에서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1883년 1월부터 4월까지 일본 요코하마에 있는 네덜란드 영사관의 서기관 레온 폴데르에게서 영어를 배운 뒤, 그해 5월부터 서울에서 주한 미국 공사 푸트(Foote)의 통역으로 발탁된 10대 후반의 윤치호. 네이티브 스피커도 아닌 네덜란드 사람에게 고작 4개월 동안 영어를 배운 뒤, 임금 앞에서 중차대한 국사(國事)의 통역을 성공적으로 해낸 그는 천재임이 틀림없습니다.

 

조선 최초의 도미(渡美) 사절로 188년 미국에 건너간 민영익(閔泳翊:1860-1914)의 신임장을 윤치호가 영문으로 번역한 것을 보면 ‘비준(批准:ratification)’이란 단어처럼 당시 조선에서 잘 알려지지 않았던 근대적 한자어의 영문 번역어까지 보입니다. 한자로 써놓아도 무슨 뜻인지 잘 몰랐을 단어의 정확한 의미를 윤치호는 영어로 파악했던 것이지요.

 

그의 천재성은 1888년 11월 4일부터 시작된 미국 유학 때 더욱 빛을 발합니다. 그는 미국에 온 지 1년쯤 되던 1889년 12월 7일부터 거의 완벽한 영어로 일기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지만, 윤치호의 일기에는 현재의 미국 지식인들도 쉽게 이해하지 못할 만큼 수준 높은 어휘들이 보입니다.

 

예컨대 그는 미국에서 만난 한 일본계 의사에 대해 “dissimulation’을 지혜로 잘못 알고 있다”(윤치호 일기 1890년 2월 27일자)라고 평하고 있는데, ‘dissimulation'이 '본인의 나쁜 점을 숨기는 위선’을 뜻한다는 것을 아는 미국인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변변한 영한사전도 없이 난삽한 인문서적을 탐독하여 ‘dissimulation’과 같은 라틴 계통의 고급 어휘를 습득한 윤치호의 실력과 투혼이 실로 감동적이지 않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