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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기 영어이야기—최초의 영어 전습소(傳習所): 동문학교(同文學校)

리첫 2018. 6. 21. 09:57

개화기 영어이야기최초의 영어 전습소(傳習所): 동문학교(同文學校)

 

동문학교 설립 경위

 

19838월은 국내 최초의 영어교육기관인 동문학교가 서울 잿골<01>  83번지<02>에 있던 외아문의 내당 대청에 설립된 지 100년이 되는 기념할만한 달이었다.

 

학교의 창립 동기에 대해서는 교사로 있던 영국인 핼리팩스(Thomas Edward Hallifax)<03>가 조선에서 한몫 보려다 좌절되어 그의 청원으로 세워졌다느니<04>, 외아문<05>에 두게 된 통역관 양성을 위해서 세웠다느니<06>, 마건상(馬建常)의 제안 때문이라느니<07>, 외아문의 참판 겸 총세무사로 초빙된 독일인 뮐렌도르프(Paul Georg von Mollendotff; 1847-1901)<08>의 제안에 기인된다는 설 등이 있는데, 근본적으로는 구미 각국에 대한 문호 개방에 따라 영어 통역관의 수요가 급증하게 되자 실무부서인 외아문에 1년제의 단기 양성을 목적으로 세워진 것으로 생각된다. 학교 설립의 구상은 중국 땅 천진(天津)에서 싹텄던 것이니, 18821017일 묄렌도르프를 방문한 영선사 김윤식(金允植)듣자니 이번에 중국 학도를 데라고 조선으로 간다던데 과연 그러하오?”라고 묻자, 묄렌도르프는 서양 유학생 여섯 명을 데리고 가서 먼저 귀국 학생들에게 서양말과 글을 가르쳐서 개항장 세 곳에 두 명씩 보내서 교섭상무를 보게 한다면 크게 유익하리다.”라고 대답한 바가 있다.

 

그해 124일 천진을 떠나 뱃길로 제물포에 닿아 1213일 서울에 들어온 묄렌도르프는 민중계몽과 공업진흥이 자주독립의 요결이라는 신념 아래 전국에 소학교 800, 중학교 84, 서울에는 외국어 자연과학, 공업전문학교 등을 설립할 계획까지도 수립했었으나 재임 기간에 설립을 본 것은 동문학교 뿐이었다. 그해 522일에 조-미 조약이 체결되었으나, 농상공부의 서기관을 지낸 강화석(姜華錫)은 영어를 배울 곳이 없어서 8월에 일부러 상해(上海)의 영어학당에 6개월 동안의 유학도 불사하였던 바, 국내에서 관비로 공부하며 졸업후에는 취직까지 보장되는 관립영어학교가 설립되었다는 것은 영어학도나 나라의 앞날을 위해서도 소망스러운 일이었다.

 

개교 연월일에 대해서도 이론이 분분하여 심지어 한국지에는 1884년에 관립학교를 창립하여 통역관을 양성키 위해 미국에서 영어교사를 초빙하였는데 얼마 후에 서구문명의 근본적인 습득의 위하여 자연과학, 국제법, 이재학도 가르쳤다고 적혀 있고,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는 군부 번역관 정위 이극렬(李克烈)188248일에, 전환국 주사 이의담(李宜聃)은 동년 315일에 입교한 것으로 잘못 적혀 있다. 1883년 창립설에도 8, 9, 세모(歲暮)설 등이 있는데 한성외국어학교장을 지낸 홍우관(洪禹觀)의 이력서에는 4월로 적혀 있지만 핼리팩스가 7월에 입국하였으므로 외아문 구내에서 한해 겨울을 핼리팩스와 지낸 로웰(Percival Lowell)조선, 고요한 아침의 나라(Choson, The Land of the Morning Calm)”에 적혀 있듯이 8월이 옳을 것이다. “통서일기(統署日記)”에 고종 208월 초 3일 아침에 개학, 이학규(李鶴圭) 주사로 하여금 동문학교 일을 대행시키다.”라고 적혀 있는 것은 상학(上學-학교에서 그날의 공부를 시작함.) 쯤의 뜻일 것이므로 8월 창립설이 옳을 듯하다.

 

1880년에 설치된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의 절목(節目)에 있는 어학사(語學司)에서는 각국의 언어문자를 번역, 해석하는 일을 다루도록 되어 있었으나 영어를 다룬 적은 없었다. 사역원(司譯院) 우어청(偶語廳 <09>처럼 영어청을 병설하지 않고 청국의 동문관을 본받았을망정 근대적 교육기관으로 출범하게 된 것은 비록 그것이 서양인의 건의에 의해 채택된 것이기는 하나 개화 초기에 있어서 첫 번째의 진취적 조치였다.

 

묄렌도르프는 독일 할레(Halle) 대학에서 법률과 언어학을 배운 뒤 청국의 여러 해관과 상해의 독알 총영사관의 부영사를 거쳐 천진 독일 영사로 있을 때 청국 주재 독일 총영사로 온 폰 브란트(Von Brandt)<10> 와의 불화로 사직하고, 이홍장(李鴻章)의 천거를 받아 조선 정부에 초빙되어 임오군란 때 살해된 민겸호(閔謙鎬)의 빈 집인 수송동 85번지를 독일식으로 꾸며 놓고 살았는데 그는 자창 조선인의 원손(遠孫)이라면서 조복 차림으로 도쿄 거리를 활보하였다. 해고된 후에는 천진해관과 상해에 있는 통계국의 부국장으로 있으면서 왕립아시아학회(Royal Asiatic Society)의 부회장으로 활약하였고 1901420일 영파(寧波)<11>에서 심장병으로 별세하였다. 그는 중국서지학(Manual of Chinese Bibliography)”만주어 문법(A Manchu Grammar with Analyzed Texts)<1892>”등의 저서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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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재동

02 재동(齋洞) 83번지는 민영익(閔泳翊)의 집으로, 후에 창덕여고가 그 자리에 세워졌다.

03 통리교섭사무아문(統理交涉事務衙門)

04 핼늬팩스라고도 불리었고 한문 이름은 해래백사(奚來百士)이다.

05 길모어(G.W. Glimore)의 “수도 서울에서 본 한국(Korea from its Capital)과 오쿠라 신페이(小倉進平)의 조선어학사(朝鮮語學史) 참조*

06 마르텔(E. Martel)이 저술한 “외인(外人)이 본 조선외교비설(朝鮮外交秘說)” 참조

07 “조선사(朝鮮史)” 참조

08 한문 이름은 목인덕(穆麟德)

09 우어별체아청(偶語別遞兒廳)의 약칭. 중국어(漢學), 몽골어(蒙學), 여진어(淸學), 왜어(倭學) 등 4개 과정을 설치하였고, 이들 외국어의 회화 교육을 담당한 체아직(遞兒職) 관원이 있었다.

10 조선주재 미국공사 Heard의 사위

11 중국 절강성(浙江省)의 동부에 있는 도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