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개화기의 영어이야기--동문학교의 학제<1>

리첫 2018. 7. 11. 14:14

개화기의 영어이야기--동문학교의 학제<1>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장정(章程)”에 따르면 동문학교에서는 만 15세 이상의 총명한 자제를 뽑아서 외국말과 글부터 가르치며 학생의 적성과 능력에 따라 정치, 이재(理財)도 가르치도록 되어 있었으며 회판(會辦)이 회계와 고시의 책임을 지게하고 학교의 진흥은 독판관이 맡아 보았다. 또한 서적을 광범하게 비치하여 효용토록 하고 교사를 감독 통솔하고 생도의 학과를 엄격하게 하는 일은 장교(掌敎) 한명의 다스림과 주사의 보좌로써 하고, 책을 펴내고 신문사를 개설하는 것은 동문학교의 절차와 제도에 따르도록 규제되어 있었다.

 

동문학교도 당초에는 청국의 동문관처럼 훗날에는 외교관을 양성하고 번역 서적 등도 펴낼 의도로 세워졌던 것이다. 성적이 우수한 학생에게는 주, 부식, 땔감, , 등촉 서양 종이, 연필 등이 관급되고 대개의 학생들은 종이, , 먹만 부담하면 되었다. 결국 동문학교와 동문관의 제도상 유사점은 일부 학생의 기숙사 생활, 관비 학습, 학교 출판부를 부속 기관으로 두었다는 것이었고, 동문학교에 속해있던 박문국(1883.7.15.에 설립됨)*에서는 한성순보(漢城旬報)”[1883<고종 20> 101일에 창간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신문. 일본으로부터 인쇄기와 신문용지를 구입하여 순간<旬刊> 잡지 체제로 발간한 것인데 관보의 성격을 띄었다. 체제는 19×26.5cm 크기로 매호 24면을 발행하였다. 개화파의 주도로 간행된 이 신문은 원래 국한문체 혼용을 꾀했으나, 수구파의 방해와 활자의 미비로 순한문으로 40호 이상을 발행하다가, 갑신정변의 실패로 창간 14개월만에 폐간되었다. 한국사사전편찬회<2005>, “한국근현대사사전참조], “한성주보(漢城週)”[1886<고종 23> 1한성순보를 부활시켜 발간한 신문으로 한국 최초의 국한문 혼용 신문. 주간지로 발행되면서 국한문 혼용과 때로는 한글만의 기사와 읽을 거리를 싣는 한편 최초로 상업광고를 다룬 진보된 신문이었으나 1888년 박문국이 폐지되면서 함께 폐간되었다. 한국사사전편찬회<2005> “한국근현대사사전 참조] 의 신문이 발행되었다.

 

동문(同文)이라는 말은 둘 이상의 민족이 같은 글자를 쓰는 경우를 가리키기도 하지만 동문동궤(同文同軌)라 하여 천하가 모두 같은 글자를 쓴다.’는 뜻도 있는 것이다. 1900년대에 코베(神戶)에 있던 광동 출신의 청국 유학생들에 의해서도 동문학교가 설립되었거니와, 동문학교를 한성순보의 편집자인 이노우에(井上角五郞)는 동문학 영어숙(英語塾)이라 하였다. 원래 문간의 양쪽 협방을 가리키는 ()’이란 용어는 가숙이나 사숙에 적합한 것으로써 1900년대에 많이 사용되었다. 또한 영국 공사관의 문서에 동문관이라 적혀 있는 것은 청국인 당영조(唐榮祚)가 영국 공사관의 서기로 있었기 때문이리라.

 

교직원 진용

 

영어 교사로는 처음에 청국인 오중현(吳仲賢)과 당소의(唐紹儀)가 있다가 다른 곳으로 가게 되자 새로 영국인 핼리팩스를 초빙하였다(김윤식<金允植>. ‘음청사<陰晴史> <> 참조)*고 하지만 핼리팩스는 당초부터 영어 교사로 초빙되어 18837월에 입국하였으므로 개교 이래 교사 세 명이 가르치다가(H. N. AllenChronogical Index 참조)* 청국 교사만 세무사로 갔다. 기쿠치(菊池謙讓)근대조선사(近代朝鮮史) ()”에서 독일인 아르노우스(한문 이름 安縟)*를 영어 교사로 오인한 것은 한성순보 7의 해석 착오에 기인되는 것이다.

 

묄렌도르프와 함께 입국한 청국인 교사들은 약 4개월 남짓 가르치다가 이후 다른 벼슬에 올랐다. 묄렌도르프의 집인 박동관에 살던 오중현은 미국 유학에서 돌아와 천진의 기기동국(機器東局)에 있다가 조선으로 추방되었던 것인데, 188312월 서울 총세무사의 방판(幇辦)으로 갔다가 1886년에는 원산해관의 좌탐(坐探) 위원이 되었다.

 

광동 향산현 태생인 당소의(1860-1938)는 부친이 미국에서 무역을 하여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으며, 12세에 굉용(閎容, 1828-1912) 박사가 거느리는 제3차 도미유학단에 선발되어 굉용의 모교인 콜럼비아 대학에서 배웠는데 윤치호가 한복을 즐겨 입었듯이 그는 중국옷을 즐겨 입었다. 그도 188312월 부산세부사의 방판으로 있은 뒤, 인천 주재 청국총영사, 판리용산통상사무, 한성공서좌리 겸 번역사, 육영공원 영어 교사, 청국대리 교섭통상사의를 역임하다가 청-일 전쟁 후 귀국하여 이홍장의 구미 시찰 수행관, 양무국 회판, 천진해관 도대(道臺), 서장, 인도 의약(議約) 전권대신, 태복시경(太僕侍卿), 독판, 경한철로대신, 외무부 시랑(侍郞), 우전부(郵傳部) 시랑, 봉천순무, 우정부대신, 국무총리 등을 역임하였으며, 벨기에 차관 건으로 사퇴한 뒤 천진과 상해에서 만년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