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에 충성하기 위한 교육
설명하다보니 이야기가 단숨에 1970년대까지 가버렸다. 잠시 되돌아가 다시 메이지시대 이야기를 해보자. 학교에 가는 아이들은 점점 늘었지만, 문제는 후쿠자와가 말한 ‘가난하면서 지혜로운 자’도 늘었을지 모른다는 점이다. ‘일본이라는 나라’가 강해지려면 일반 국민까지 교육을 널리 보급할 필요가 있지만, 지혜가 생겨 가난에 불만을 품는 인간이 늘어나는 건 곤란하다. 그래서 정부로서는 국민들이 지혜를 갖게 도와주면서 충성심도 길러줄 필요를 느끼게 된다.
따라서 정부는 국민에게 읽기, 쓰기나 산수를 가르칠 뿐만 아니라, 국가에 충성심을 함양시키기 위한 과목을 의무교육에 포함시켰다. 그 당시 ‘수신(修身)’이라는 수업은 현재 ‘도덕’과 같다. 이 과목에서는 부모에게 효도를 하고, 천황에게 충의를 다한다는 도덕을 여러 가지 우화나 에피소드를 섞어 아이들에게 가르쳤다. 그 밖에 학생들에게 ‘어진(御眞)’이라고 해서 천황의 초상화 사진을 배례시키기도 하고, 천황이 발표한 ‘교육칙어(敎育勅語)’라는 도덕 문구를 암송시키기도 했다.
이러한 교육은 메이지 중기 무렵부터 강화되기 시작한다. 1877년(메이지 10)대에는 자유민권운동 같은 반정부운동이 일어나서, 정부는 그 대책을 마련하느라 어려움을 겪었다. 그래서 수신 수업에서 아이들에게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갖도록 교육하는 한편, 교과서도 처음에는 검정제로 해서 내용만 체크했지만 나중에는 모두 국정으로 바꿔버렸다. 교과서를 검정이나 국정으로 만들었을 때, 일본의 사정에 맞지 않는 서양 교과서를 직역하는 현상은 개선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정부에 나쁜 영향을 미치는 서양의 국민주권이나 혁명 등의 사상이나 그에 대한 묘사는 삭제되고 ‘일본이라는 나라’에 충성심을 갖게 하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충성심 교육은 수신뿐만 아니라, 역사수업에서도 이루어졌다. 1891년 <소학교 교칙 대강>에서 수신교육으로 “존왕애국(尊王愛國)의 기상을 배양할 것”을 강조하면서 “일본역사는 우리나라 국체의 대요를 알게 하고 국민다운 지조를 기르는 것을 요지로 한다.”고 쓰여 있다. 결국 역사 교과서는 천황의 선조가 ‘일본이라는 나라’를 세웠다는 점을 강조하고, 천황에게 충의를 바친 무장 등을 칭송하는 내용이 들어가게 되었다. 이러한 교육으로 학생들에게 “나는 훌륭한 일본인이다.”는 자각을 배양하는 것은 국민 전원을 교육해서 ‘일본이라는 나라’의 힘을 강하게 함과 동시에 후쿠자와가 말하는 “가난하면서 지혜로운 자,” 즉 지혜만 몸에 배고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 없는 인간이 나오지 않도록 하는 데 필요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일본의 근대화는 국민 전체에 서양 문명 교육을 고루 보급하면서, 동시에 정부나 천황에 대한 충성심을 기르는 방향으로 진행되어갔다. 그리고 1895년(메이지 28)에 메이지 이후 최초의 대외전쟁인 청일전쟁에서 승리했다. 이것은 국민을 교육함으로써 나라 그 자체의 힘을 기르면서, 동시에 그 힘을 나라가 명령하는 방향으로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후 일본의 역사는 후쿠자와가 예언한 방향으로 나아갔다. 즉 ‘서양’에 ‘침략 받을 염려가 있는 나라’에서 ‘서양’과 나란히 ‘동양’ 국가들을 ‘침략하는 나라’가 되었다. 후쿠자와는 청일전쟁에 임하기 전, 이 전쟁은 나라 대 나라의 싸움이라기보다 문명 대 야만의 싸움이라고 주장한 <청일전쟁은 문야(文野)의 전쟁이다>는 시론을 쓰고, 군자금 모집을 호소할 정도로 열의를 보였다고 한다. 청일전쟁으로 일본은 타이완을 영유했다. 구리고 1905년(메이지 38) 러일전쟁에서 승리하고, 1910년에는 한국을 병합했다.
그 후 1929년에 세계공황이 일어나 그 여파가 일본에도 들이닥쳐 가난한 사람이 많아졌다. 그러나 후쿠자와가 예언한 대로, 그 불만은 정부로 향하지 않고, 새 식민지를 획득해야 한다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일본은 1931년에는 만주사변으로 중국 동북부를 사실상 지배하게 된다. 1937년에는 중일전쟁을 일으켜 중국의 오지까지 쳐들어간다. 마침내 1941년 태평양전쟁을 벌여 아시아 일대를 일시적으로나마 지배하기까지 이르렀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