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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기 영어이야기--교직원 진용<2>

리첫 2018. 8. 2. 14:38

개화기 영어이야기--교직원 진용<2>

 

한편, 핼리팩스는 일본 정부의 전신료(電信寮)에서 건축보조원으로 월급 150달러를 받고 3년 동안 있었으며 이본에서 14년이나 사는 동안에 일본 여자와 결혼하여 외동딸을 두었다. 그는 묄렌도르프의 초청을 받고 1883년 7월 부인과 함께 기선편으로 건너와 재동 외아문 구내의 뒤편 언덕에 있던 절간 자리에 살면서 월급은 총세무사에서 탔다. 전신 기술을 배우기 전에는 평범한 선원이었다던 핼리팩스는 동문학교가 폐쇄되던 1886년부터 남전국(南電局)의 전무교사로 가서 월급 100원을 받으면서 학생들에게 타전법, 번역, 전리학, 전보규칙, 산수, 영어 등을 가르쳐서 불과 3개월이라는 놀라운 속도로 경부(京釜)간의 전신 가설을 끝낸 공로가 인정되어 1888년 7월 19일 통정대부(通政大夫)가 제수되었다. 동문학교가 폐쇄되었을 때 구직을 위하여 영국 총영사 서리 베버(E. Colborne Baber)가 김윤식 독판에게 그의 구직을 간청하였으나 김윤식으로부터 아직은 받을 자리가 없으니 구조할 길이 없고 지난 3년간의 공이 크기는 하나 그가 물러가는 것을 만류할 수 없음이 애석할 따름이란 답을 듣고 있던 차에 때마침 전무교사로 취직이 되었다. 그 뒤에도 핼리팩스는 육영공원, 한성영어학교, 한성외국어학교, 영어부 등을 거쳤고, 개화기의 관립영어학교의 영어 교사를 고루 역임한 유일한 인물이 되었다. 1908년 6월 하순 출국에 앞서 우리 정부는 과거 15년간 그가 공로한 공로를 가상히 여겨 5월 20일에는 위로금 5천환을 하사하고 12일에는 학부대신 이재곤(李載崑)이 만찬회를 베풀어 주었으며 15일에는 훈4등 태극장이 그에게 서훈(敍勳)되었다.

 

한편 동경의 프랑스 교중학교에 7년간 다니던 18세의 외동딸은 관립한성영어학교의 부교사로 있으면서 1895년 7월 12일 은화 508원에 구입한 한성부 남부훈도방 초동에 있는 빈터 200간(間)이 딸린 54간 반의 기와집에 살던 부모를 만나러 1897년 8월에 왔다가 이질로 사망하였다. 9월 8일 자택에서의 장례식에 이어 명동 천주교 성당에서 내외귀빈이 참석한 가운데 영결미사를 올린 뒤 양화진의 외인묘지에 안장되었다. 외인묘지의 운영위원이었던 핼리팩스는 애끊는 심정으로 묘비를 세웠던 것인데, 난리 때 대리석 비신은 파손된 채 땅에 덜어지고, 지금은 비신이 꽂혔던 2단의 화강암 받침돌에 “LOVING MEMORY OF THOMAS EDWARD HALLIFAX"라고 음각된 글씨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동문학교 초기의 학교 직원에는 김윤식의 종형으로 한성판윤, 예조, 형조, 공조판서 등을 지낸 김만식(金晩植:1834-1900)이 협판(1883.3.17-12.13)으로서 장교(掌敎)를 맡았으며 주사에는 벼슬이 부제학에 올랐다가한성고등학교의 한문 교사와 대동학교의 강사 등을 지내면서 저서도 남긴 한문의 대가요 애주가였던 여규형(呂圭亨:1849-1922)과 천진 수사학당에서 8개월 동안 영어만 배워온 중국어 역관(1876년 식년역과 급제) 출신인 고영철과 내부대신 및 한성판윤까지 오른 남정철 등이 있었다.

 

영어 학습

 

학생들의 나이는 15세에서 30세까지였으며 학생 수는 29명, 30명, 35명, 40명 선을 오르내렸는데, 절반으로 갈라서 오전과 오후반으로 나누어 하루는 긴 말과 짧은 말, 글자의 풀어쓰기부터 뜻의 변통하기 등을 가르치고 다른 날에는 긴말은 가르치지 않고 다만 짧은 말만을 가르친 다음 서양의 필산법으로 이어졌으며 학습 진도는 매우 빨랐으며 영어나 산수 등을 모두 영어로 가르쳤다. 오중현, 당소의 교사와 학생들 간의 교량적 역할을 위하여 중국어 역관 출신으로서 8개월 배운 영어 실력을 지녔던 고영철 주사의 통역이나 일본말을 하는 핼리팩스의 수업을 돕기 위하여 왜어통변이 활용되는 조교사 제도가 필요 없었던 만큼, 처음부터 체계적 학습법(Mastery System/Rational Method)에 준거한 교수법으로 가르쳤을 것으로 보인다. 이 방법은 1892년 4월 30일 인천에 설립된 영화(永化) 여학당에서도 쓰였는데, 마커(Miss Jessie B. Marker) 선생이 실물을 들어보이면서 “Apple. An apple. This is an apple."식으로 낱말부터 시작하여 문장으로 넓혀 나가는 방법으로 가르쳤다. 핼리팩스는 그렇지 못하였겠지만 당 교사와 오 교사는 미국에서 대학을 다녔으므로 언어 장벽을 극복하면서 가르칠 교수법에 대한 연구가 있었을 것이다.

 

학생들은 옛 관습대로 한문을 배우다가 입학하였으니 한문의 문장 구조를 닮은 영문을 해득함에 있어서 그들의 한문 지식은 유효하게 쓰여졌을 것이지만, 듣고도 못들은체 ‘귀머거리 3년에, 벙어리 3년’이라는 속담처럼 감정을 억누르고 희노애락을 나타내지 않는 것을 계명이나 미덕으로 삼았던 생활윤리는 감정의 표시나 고저장단의 억양을 필요로 하는 영어 학습에 저해 요소가 되었을 것임은 물론이다. 그러나 단어의 발음 표기나 뜻을 한문으로 적어서 배우던 중국어를 매개로 한 영어 교습이 개화기의 특징이었는데 이러한 경향은 일본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코리안 리포지터리(Korean Repository)”에 “한국의 석유(Petroleum in Korea)” 등 3편의 논문을 발표한 미국 침례교파의 선교 의사 맥그로완(Daniel Jerome Macgrowan:1814-1893)은 1859년 중국 영파에서 일본 나가사키로 가서 몇 주일 머무는 동안 미국 배에서 중국어 통역관 정간보(鄭幹輔:1811-1860) 등 6명에게 중국어로 영어를 가르친 일이 있었다.

 

필자는 동문관에서 사용된 영어 교과서를 찾다가 “산학과예(算學課藝)” 제4권<1880>을 입수하였을 뿐이지만, 동문관 연구의 권위자인 코넬(Cornel) 대학의 비거스타프(Knight Biggerstaff) 교수도 동문관에서 사용된 교과서를 본 일이 없다고 하거니와, 청나라 이원형(李元亨)이 저술했던 “영자지남(英字指南)”<1879>에 한글 표기의 필적이 있고 수학원에서도 “화영진계(華英進階)”<1907>를 사용한 것으로 보아 동문학교에서 사용된 영어 교재도 청국판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동문학교의 교과서는 외아문에서 관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