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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기 영어 이야기--영어 학습<2>

리첫 2018. 8. 21. 09:36

영어 학습<2>


동문학교의 1회 졸업생인 남궁억(1863-1939)은 20세에 송달현(宋達顯), 주우남(朱雨南)과 도포에 통영갓 차림으로 배웠는데 길에서 만나는 친구마저 서학(西學)을 하는 ‘천주학쟁이’라 하여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가족조차 절교하였으나 장래를 보고 삯바느질하는 모친 슬하의 냉방에서 밤새도록 단어마다 붉은 점이 찍힌 영어사전이 덜어지다시피 읽었는데 한 단어에 5회 이상 점이 찍히는 경우를 극복하면서 공부한 끝에 우등으로 졸업했으며 그가 방안에서 말할 때면 영국 사람끼리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한서 남궁억이 지은 “조선 니야기”에는 다음과 같은 동문학교의 풍경이 묘사되어 있다.

 

외아문 구내에 관립영어학교를 세우고 생도를 모집 교수하였으니 이는 조선 신식학교의 효시인데 우스운 일은 소위 생도 중 약간인은 이정승, 김판서의 자질로 등제한 소년이라 매일 아침 등교 때에 도포를 입고 보교(步轎) 위에 담뱃대를 비스듬히 물고 앉았는데 보교군 두 명 외에 구종 한 명이 요강망태와 담배설합을 등에 지고 별배(別陪) 두 명이 ‘에라 물러 섰거라“하는 벽제성으로 큰 길을 건너 문 앞에서 내려 엄연한 태도로 갈지자 걸음을 할 때 두 별배가 두 겨드랑이를 부축하고 천천히 층계를 올라간즉 교사는 영국인이라 우리 습속에 소매(견문이 좁고 사리에 어두움)하여 통역에게 이르기를 생도로 보건대 얼굴이 창백하고 걸음이 느리며 두 사람이 부축하고 걸으니 필시 환자이니 아무리 등교 시간이 지중하더라도 하루 이틀 집에서 치료하여 차도가 있은 뒤에 등교하여도 무방하니 당장 돌아가도록 권고하니 통역이 깔깔 웃으며 그 뜻을 전하자 장내의 생도가 '아이구 우섭다'고 하더라.

 

1884년 6월에 졸업한 한서 남궁억은 메릴(Henry F. Merill)이 있던 묵관(墨館)과 뭴렌도르프가 있던 박동관(礡洞館), 인천세무사 등의 번역관으로 월급 20원에 있었으며, 인천 세창양행주인 월터(Carl Walter)를 고종이 불어올 때나 1886년 내부주사로 있을 때는 어전 통역을 하였다.

 

1887년에는 전권대신 조신희(趙臣熙)를 수행하여 구라파 여러 나라를 돌고 1889년 1월에 귀국한 그는 이번에는 궁내부(宮內部) 별군직(別軍職)으로 4개년 동안을 지냈고, 경상도 칠곡(漆谷)의 부사(府使)를 지낸 다음 다시 내부의 토목국장(1894-1897)을 지냈는데, 내부 토목국장 재직시 밤에는 흥화학교에서 영문법과 동국사를 가르쳤다. 그 후 독립협회의 수석총무와 사법위원으로 “인디펜던트(The Independent)”의 편집을 보았고 황성신문 사장을 역임했다. 그는 양양군수 재직(1906-1907)시에 세운 현산학교에서 영어와 음악을 가르쳤으며, 배화학당에서 영문법과 대한역사의 교사로 재직(1910-1918)시에는 상동청년학원(남대문의 새로나 백화점 자리에 있었음)의 장을 겸직하였다.

 

배화학당 재직 시의 한서 남궁억에게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1914년 2월의 어느 토요일 배화학당 고등과 3회생 14명을 위한 영문법 시간에도 한서는 전처럼 조선 역사를 가르쳤는데, 총독부의 세키야(關屋貞三郞) 학무국장 일행이 갑작스럽게 들이닥치자, 망을 보던 학생의 연필 치는 신호로 역사책은 삽시간에 감춰진 듯 하였으나 평소에 덤벙대는 류인희(柳仁姬)가 미처 감추지 못한 채 걸상 밑에 떨어뜨린 것을 발로 집어 올려 치마 속에 감추게 되었고 선생은 의연하게 영문을 칠판에 쓰면서 영어에 재질이 있는 김오재(金悟材) 학생에게 읽혔다. 우여곡절 끝에 고대하던 수업 종료의 종이 울리고 방문객이 사라진 뒤 선생은 울음을 터뜨리는 류 양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모든 것이 어른들의 죄라면서 후원으로 갔다.

 

한서의 둘째 따님 자경(慈卿:4회)도 배화에서 영문법을 배웠는데 영어는 책도 없었고 아버님이 칠판에 써놓으면 종이나 검은 석판(신문지 1/4크기)에 석필로 써서 배웠으며 아버님은 발음이 명확하다는 평판을 들었다고 한다. 자경 여사는 영어와 한글을 연구하고 조국의 완전한 자주 독립을 추구하는데 뜻을 함께한 부친과 좌옹 윤치호와의 오랜 세교로 정혼된 바에 따라 좌옹의 차남인 윤광선(尹光善)과 결혼하였는데 좌옹은 애국가를 작사하였다고도 하며 한서는 무궁화를 국화로 보급하는데 앞장선 일도 있다.

 

외아들인 남궁염(南宮炎)은 한성영어학교 제3회 졸업생(1902년 11월-1905년 1월까지였고, 최종 졸업생은 7명)으로, 배재학당을 나온뒤 YMCA창립에 참여하다가 도미하여 1918년 랜돌프-매이컨(Randolph-Macon College) 대학을 나온 뒤 구미위원 부서기, 뉴욕 주재 총영사를 지냈으며 미망인과 3남매를 남겼다. 1918년 강원도 홍천군 모곡리에 낙향한 한서가 세운 보통학교의 3학년에서는 알파벳부터 영문법을 1주당 2시간, 4학년에서는 읽기-영작 등을 1주당 4시간씩 가르쳤는데, 이는 1920년대 동양의 초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친 유일한 학교였으리라.(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