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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nger to Harvard--치열함이 만들어 준 공부 전략<7>

리첫 2019. 8. 6. 11:37

Hunger to Harvard--치열함이 만들어 준 공부 전략<7>

 

1998년, 17세 여름

 

아버지는 다시 지구 반대편으로 떠나나시고, 여동생과 나만 남았다. 그러나 우리 남매는 이전과는 다른 상황에 놓였다. 동경대 진학을 결심한 나로서는 학업에 집중하기 위해 더 이상 아르바이트를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경제적 수익과는 거리가 먼 봉사 활동에 전념하시는 아버지의 도움도 기대할 수는 없었다. 일본육영회 장학금을 빌려야만 했다. 절약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찾아 익혔으나 그 돈만으로는 생활을 이어 갈 수 없었다. 전화가 불통이 되고, 전기가 끊겨 여러 차례 암흑 세상을 맞기도 했다. 염가 판매 광고를 찾아 식재료를 사면서도, 우리 식탁의 메인 반찬은 주로 양배추였다. 쌀은 아버지 친구가 운영하시는 쌀가게에서 조달받았다. 돈 없이 쌀을 요청하기가 어린 마음에도 한없이 불편했지만, 처한 현실이 다른 생각을 할 여유를 주지 않았다.

 

반찬 없이 밥을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방법을 궁리하던 나는 따끈한 밥에 버터(실제로는 마가린)와 간장을 섞어 비벼 먹었다. 버터 향과 간장의 구수한 맛은 식욕을 돋우어 주었다. 비록 반찬은 없었지만 만찬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부재료가 전혀 없이 볶음밥을 만들거나, 밀가루와 설탕만으로도 케이크를 만들어 먹을 수 있게 되었다.

 

균형 잡힌 영양식은 아니었지만, 게다가 조리 시간도 짧아 공부 시간을 더 많이 확보할 수 있었다.

 

더위보다 더 치열한 삶, 빈곤한 여름 수험 생활

 

여름 수험 생활, 냉방 시설을 갖춘 시립 도서관에서 공부하려 했으나, 그 계획은 곧바로 변경되었다. 도서관에서는 주변으로 신경이 분산되는 데다 글 한 줄 소리 내어 읽을 수 없었기에 학습 효율이 떨어졌다. 나에게는 자유롭게 페이스를 유지할 수 있는 집이 공부하기에 오히려 효율적이었다. 규슈의 여름 더위는 지독했다. 하지만 우리 집에는 냉방기가 전혀 없었다. 흐르는 땀에 프린트물이 젖었으나, 나는 공부한 내용을 문제집 이면지에 진한 글씨로 꾹꾹 눌러써가며 머릿속에 그리고 뼛속 깊이까지 새겨 넣었다. 야구를 하였던 나는 공부도 스포츠의 하나로 여겼다. 야구 선수 생활을 하며 익혔던 훈련 방법을 공부하는 데도 활용하였다. 인터벌을 두고 연습을 거듭하여 그 활동이 몸에 배도록 하였고, 수험 공부를 하는 데는 다양한 뇌 근력이 필요하다는 판단에서 필요에 따라 부분 부분을 단련해 나가며 전체 밸런스를 조정하였다.

 

게다가 그해 여름 방학은 여동생이 친척집으로 가면서 나홀로 지내게 되었기에 제대로 구색을 갖춘 식사도 거의 하지 않았다. 공부할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먹는 시간조차 아꼈다. 그러다 보니 버터라이스 같은 메뉴가 다반사였다.

 

다른 시간을 아껴 공부에만 집중하려는 마음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정작 사람이 한 시간 이상 집중력을 유지하기 힘들다는 사실을 학습 체험을 통해 터득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공부를 하다 집중력이 떨어지는 틈틈이 세탁이나 설거지 등 집안일을 하였다. 그렇게 잠깐씩 몸을 움직여 주는 것이 오히려 기운을 재충전시켜 주기도 하고, 뒤이어지는 공부에 집중력마저 높여주는 효과가 있었다.

  

이러한 인터벌을 몸에 익히며, 나는 여름 방학 내내 하루 14시간 이상 공부하는 생활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한 생활은 스스로 항상 꿈꾸며 갈망하던 삶이었다. 흐르는 땀을 식힐 여유조차 없는데, 오른팔마저 아파 왔다. 18세 여름, 나는 참으로 치열한 싸움을 치렀다. 고독하였으나 진정 즐거웠다. 내가 정말 금욕적인 사람일까? 그 여름을 치르며 내 자신에 던질 질문이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시간이 흘러 나중에 느꼈던, 그리고 지금 더욱 확연히 알게 된 사실은, 그해 여름, 비록 굶주림은 있었으나 그때 응시한 미래는 항상 환하게 빛나던 그런 희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