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가 기뻐하는 공부법--괴짜 마인드가 뇌를 기쁘게 한다<34>
영국의 케이브리지 대학교에 있는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공부한 적이 있다. 케임브리지 대학교는 뉴턴을 비롯한 많은 학자와 예술가들을 배출한 전통 있는 학교다. 이 대학 안에는 내가 다니던 트리니티 칼리지를 포함해 31개의 칼리지가 있다.
트리니티 칼리지에는 여러 분야의 사람들이 소속되어 있다. 그런데 이곳 식당에서는 하이테이블(대학 식당에서 한 단 높은 교수자리)에 모인 교수들이 전공 분야에 전혀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논의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처음부터 아예 자신과 같은 분야를 연구하는 학자 가까이에는 앉지 않는다. 예를 들어 물리학 전공자 옆에는 수학 전문가가 앉아 있고, 그 옆에는 영문학, 맞은편에는 정치학, 이쪽에는 역사학------ 이런 식으로 다양하고 풍요로운 인류의 지성이라는 숲 안에서 여러 가지 활동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이처럼 각 분야를 대표하는 연구자들이 함께 식사를 하면서 수준 높은 논의를 하는 모습은 아쉽게도 우리의 대학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광경이다.
아름다운 예배당 같은 다이닝홀에서 전혀 다른 분야의 교수들이 활기찬 모습으로 자유롭게 토론하는 광경을 보노라면, 이런 환경이 있기에 노벨상 수상자를 81명(이 중 졸업생은 59명, 2005년 12월 현재 기준)이나 배출해냈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내가 느꼈던 분위기는 ‘괴짜로 있을 수 있는 자유’였다. 케임브리지에서는 겉모양이 번지르르해서는 안 된다. 말쑥한 양복차림으로 캠퍼스를 걸어 다니다간 “저 녀석은 평범한 사람이군.”이라는 무시 아닌 무시를 당하게 된다. 반대로 구멍 뚫린 스웨터를 입은 사람이 끽끽거리는 고물 자전거를 타고 캠퍼스를 달리고 있으면, 다들 “저 사람은 틀림없이 위대한 학자일거야!”라는 존경의 눈빛을 보낸다.
그곳에서는 평범한 사람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아니 괴짜밖에 없다고 하는 편이 적절하다. 케임브리지 트리니티 칼리지는 그런 곳이었다.
그러면 괴짜란 어떤 사람을 말할까? 이것도 천재의 경우와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괴짜 역시 태어날 때부터 괴짜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행동에 대해 도파민이 대량으로 분비되고 그로 인해 강화학습 사이클이 작동한다. 이 사이클이 폭주해서 다른 사람과는 다른 방향으로 점점 튀게 된다. 이것이 바로 괴짜가 괴짜인 이유다.
트리니티 칼리지의 ‘괴짜로 있을 수 있는 자유’는 바꾸어 말하면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마음껏 추구할 수 있는 자유’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마음껏 추구할 때 인간이 어떻게 발전해 나가는지에 대한 사례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아이포드로 유명한 애플컴퓨터의 창업자 스티브 잡스나 마이크로소프트의 창업자 빌 게이츠도 모두 괴짜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우리는 솔직히 괴짜가 허용되는 문화가 못 된다. 오히려 반대로 ‘다른 사람과 같지 않으면 안 된다’는 (무언의) 압력이 있다. 이처럼 친구나 동료, 사회적 통념 등 주변으로부터 받는 압력을 ‘피어 프레셔(peer pressure)’라고 한다. 피어 프레셔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상대의 두드러짐을 가속시키는 힘으로, 트리니티 칼리지로 상징되는 피어 프레셔다. 다른 하나는 ‘평균치로 끌어내리는 압력’인데, 우리는 언제부터인지 이러한 피어 프레셔가 되어 버렸다. 따라서 괴짜가 한층 더 발전된 괴짜가 되는 일은 좀처럼 용인되지 않는다.
한편 미국이나 영국은 ‘괴짜’로 사는 것이 허용되는 사회다. 그러한 풍토에서는 괴짜라는 특성, 즉 강화학습 회로를 폭주시키는 습관을 경영에도 활용할 수 있다. 이것은 우리가 대단히 참고할 부분이다.
우리의 문화는 융합을 중요시 하나. 이러한 문화는 우리의 자랑거리가 되기도 하지만, 세계적인 규모로 경쟁해야 하는 이 시대에는 오히려 걸림돌이 된다.
나도 초등학교와 중학교 때 우리의 독특한 피어 프레셔를 강하게 느꼈고 그것 때문에 무척 힘들었다. 타인과의 다른 점을 인정하지 않고 똑같이 행동하도록 요구받았기 때문이다.
고등학교에 올라가서야 비로소 영혼의 안식처를 찾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왜냐하면 내가 진학한 학교에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좋은 의미의 괴짜가 많았기 때문이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대학 입시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고등학교 3학년 가을의 일이다.
학교에서 가장 가까운 역인 가쿠게 대학역에서 한 친구가 책을 읽고 있었다. 그는 내가 ‘머리가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 한 명으로, 현재 도쿄 대학교의 조교수로 있다. 나는 역에서 책을 읽고 있는 그에게 뭘 하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입시 공부 때문에 이런 때가 아니면 책을 읽을 시간이 없어서”라며 읽고 있던 책을 보여 주었다.
그 책은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1세의 전기였다. 잠도 안자고 공부해도 시간이 모자랄 판에 엘리자베스 1세의 전기를, 그것도 원서로 읽고 있었다. 보통 때라면 ‘이렇게 중요한 시기에 무슨 짓이야’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때는 진심으로 ‘이 녀석 굉장한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고등학교 졸업 문집에 ‘라틴민족에게 있어서 영광이라는 개념’의 에세이를 썼다. 나는 그때 그에게서 학문의 깊이란 어떤 것인지를 배웠다.
일반적으로 우리 사회는 조금 이상하거나 특이한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을 평균치로 끌어내리려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트리니티 칼리지는 이와 반대다. “더 이상해지는 거야! 더 특이해지라구!” 하고 더욱 괴짜가 되도록 부채질한다.
이러한 차이는 무엇 때문에 생기는 것일까? 영국인이 우리보다 유전적으로 지능이 높아서? 아니다. 두 나라 간의 차이는 바로 ‘이상한 행동을 수용’하는 문화냐 아니냐에 있다.
물론 영국에도 피어 프레셔는 있다. 그러나 영국인의 발상이 탁월했던 것은 괴짜들이 그대로 묻히도록 놔두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모아서 커뮤니티를 형성해 ‘지식’으로 승화시키는 구조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전 생애를 통해 학습을 습관화시키기 위해서는 이러한 환경에 자신을 두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우리는 트리니티 칼리지와 같은 커뮤니티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