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자유교육운동에서 그룬트비와 콜의 역할
1) 니콜레이 그룬트비(Nikolaj Frederik Severin Grundtvig)
덴마크 근세사에서 그룬트비만큼 영향력 있는 인물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그것을 입증하듯 “사람들은 그를 나라의 경계에서부터 만난다.”는 말이 있다. 덴마크 땅으로 들어서게 되면서부터 사람들은 자연과학 및 기술공학적이라고 각인된 덴마크 사람들의 기질과 그룬트비가 남긴 유산 사이의 긴장관계를 경험하게 된다. 인간성, 자유 그리고 살아 있는 교류와 교육에 관한 그룬트비의 사상은 끊임없는 투쟁과 영감을 불러일으킨다. 이 주제들은 특히 그룬트비가 만든 수많은 애국적인 노래와 찬송가에 잘 나타나 있다. 그룬트비는 시민대학, 자유중등학교, 자유학교와 같은 여러 학교의 아버지가 되었다. 이런 학교들은 덴마크 전역의 학교와 교육의 전통을 만들어 냈다. 그는 교회 예배 방식에도 깊은 영향을 끼쳤다. 덴마크 교회의 예배 시간에는 그룬트비의 찬송가가 꼭 불려진다.
그룬트비의 근본 사상은 인간은 다른 사람에게 나아가기 전에 자기 자신에게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우리에 대해 말하기 전에, 나에 대해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 모두가 알아야 할 하나의 중요한 사실은 인간은 각기 독특한 특성을 가진 존재라는 것이다. 자신을 하나의 인격으로 흥미롭게 발견하는 일은 전적으로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자신만을 유일하게 흥미로운 존재라 여겨서는 안 된다. 모든 사람이 그렇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이 된다 함은 자기 자신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Jorgen Carlsen: Die Dänische Folkehøjskole, 1993 14~15)
그룬트비의 역사적 위치
그룬트비(1783~1872)는 번영을 구가하던 19세기 중엽의 덴마크 사회에서 살았다. 당시 덴마크는 왕정 체제 아래에서 오랫동안 평화로웠고 상업과 교역은 동북아시아와 서인도에 이를 만치 번창했다. 중산층은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부를 향유했고, 농민들이 겪는 사회적 억압과 경제적 곤궁을 개선하려는 개혁조치도 일부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 시기 덴마크는 물론 유럽 전체에 널리 알려진 인물로는 동화작가 안데르센(Hans C. Andersen), 실존주의 철학자 키르케고어(Soren Kierkegaard), 신고전주의 조각가 쵸어밸센((Bertel Thorvaldsen)이 있다. 하지만 현대 덴마크 사회를 위해 누구보다 중요하고 다방면에 걸쳐 불후의 업적을 남긴 사람은 바로 그룬트비다.
그룬트비는 덴마크 루터국교회에서 지도적 영향력을 행사한 목사이자 시인으로, 라틴어와 앵글로색슨어, 현대 덴마크어 분야에서 독보적인 언어학자로, 당대를 대표하는 역사가이자 문화철학자로, 독보적인 북유럽신화 연구가로, 덴마크에서 널리 사랑받는 1,400여 편에 이르는 방대한 찬송가의 번역자 겸 작가요 편집자로, 정치가이자 교육자로, 근대의 덴마크가 종교, 문학, 역사, 정치 경제, 교육 등 문화 영역에서 새로운 면모를 갖추는 데 결정적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그룬트비는 자신이 속해 있던 중부 유럽과 스칸디나비아 문명권, 특히 영국의 영향권 안에서 덴마크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에 몰두한 사람이었다. 또 1848년부터 1849년까지 2년간 제헌의회 의원으로 절대왕정의 종식을 ‘신자유헌법(New Free Constitution)’ 제정을 둘러싼 논의와 투표에 참여했다. 19세기 강력한 독일의 정치적 위협과 긴장 관계 속에서 덴마크의 정신과 삶을 지키고자 거국적인 투쟁과 스칸디나비아 여러 나라들을 위한 정신운동, 교육운동에도 참여했다. 이 모든 영역에서 그룬트비는 당대 어떤 사람들보다 왕성한 활동을 했다. 그의 저작물은 130여 권에 이르며 종종 독일의 괴테(Johann Wofgang Goethe)비견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