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룬트비는 민중적 문화의 개화를 위해 청소년을 비롯한 평민과 ‘삶의 계몽(Enlightenment of Life)’이라는 명제를 제시했다. 그 전망을 현실화하려는 발판으로 1830년(7월 혁명이 일어났던 해로 이후 민주사회로의 이행이 결정적으로 예고된 시점)경부터 시민대학(folkehøjskole)를 구상했다. 이는 향후 국민 대중의 참여로 정치체제상 변화가 불가피하리라는 판단과, 그럴 경우 국민 대중이 사회 제반 문제에서 자유롭고 강력하게 자신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을 정도로 민주적 교육을 받아야 하리라는 인식에 상응하는 구상이었다. 그는 이 시민대학을 덴마크 국민이라면 누구나 들어가 교육받을 수 있으며, 장차 도래할 민주사회에서 법적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당당한 시민을 준비시키기 위한 민주적 대학으로 만들고자 했다. 여기에는 신중한 정치적 고려가 작용하고 있었는데, 즉 그렇지 않을 경우 지적 엘리트 그룹이 지배적 권력을 행사할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적 엘리트 그룹이 나은가? 현명한 왕정제가 나은가? 그는 만일 정당한 조건이 충족되지 않을 경우 후자가 차라리 낫다는 입장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룬트비는 이 구상을 위해 거의 20년 동안 힘을 기울였으며, 그 학교가 설립되도록 마지막 왕 크리스티안 8세를 거의 설득까지 했다. 하지만 1848년 절대왕정이 폐기되고 의회가 설립되었을 때 정권을 잡은 자유주의적 엘리트 그룹은 국민 대중을 위한 그런 식의 시민대학을 무의미하게 여겼다. 그들은 국민 대중을 위한 교육은 위로부터 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엘리트 그룹은 국제적 위상을 가지며 옛 고전적 교육이 가능하게 했던 세계를 대표하는 이들로 여전히 이 패러다임 안에서 사고하면서 또 새로운 시대정신 아래에서도 이를 지지했다. 민주주의를 대변하고자 했던 젊은 계층이 그룬트비의 진보적 사상을 억누르게 된 것은 참으로 모순된 일로, 이는 그룬트비가 이전에 예상했던 그대로의 결과였다.
시민대학에 대한 구상에서 그룬트비는 학교의 위상을 라틴어 학습을 전제로 하는 사회 상층부와 지적 엘리트 그룹을 위한 대학에 필적하는 것으로 설정했다. 교육의 주요 내용으로는 덴마크 사회와 문화의 기반이 되는 신화, 모국어, 민요, 조국의 역사와 문학 등을 제시했다. 특이한 것은 특정한 사회적 직종을 위한 특정한 시험 구조는 아예 폐지하고, 다만 그러한 요구에 맞는 자질과 능력을 갖출 수 있도록 가르치는 데 있었다.
시민대학의 목표가 계몽이었던 것만큼 그룬트비는 루소에게서 흡사한 점을 발견했으나 그가 인간의 본성에 원천을 두려 하고 영적 차원을 간과한 것에는 반대했다. 그러나 삶의 계몽이라는 점에서는 신학적으로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사고하려 했다. 그는 인간의 삶 그 자체의 의미를 드러내고자 했고 역사가로서 역사의 계속인 현재의 삶을 해석하고자 했다. 또 한 개인이 속해 있는 삶의 연속적 맥락에서 역사의 특징을 보고자 했다. 그는 삶의 계몽을 ‘역사적 시집’이라 표현했다.
시민대학이란 한 민족의 부분인 개인에게 이러한 연속성의 의식을 품도록 하려는 인위적 방법으로써 ‘삶을 위한 학교’여야 했다. 내세를 위한 학교가 아니라, 계몽을 요구하는 현재의 직접적이고 일상적인 생활을 위한 것이어야 했기 때문이다. 삶을 위한 학교는 부자연스럽고 딱딱하고 냉랭하고 어둡고 죽은 태도에 반하는 것이다. 그는 훌륭한 교사의 필수 요건으로 풍부하고 내면적이며 영혼적인 것을 들었다. 이 시각으로 시민대학에서는 문어체가 아니라 ‘살아 있는 말’, 즉 일상생활에서 입으로 사용하는 언어를 통해서 가르칠 것을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