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몽을 위한 방법에서 그가 첫 번째로 중시한 것은 자유였다. 자유는 결코 윤리적 언설이나 요구의 형태 따위가 아니라 유순하고 온화한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했다. 이를테면 ‘상호작용(Interplay)’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다고 했다. 이는 학생은 교사로부터 배우지만 교사는 학생으로부터 배워야 함을 의미한다. 물론 그러한 접근 방식의 기초는 교사가 먼저 놓아야 한다고 했다. 가르침에서 중요한 것은 살아 있는 흥미를 바탕으로 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를 테면 여러 이유로 우연히 흥미를 가지게 된 문제를 가지고 다루는 식으로 그 때문의 삶의 계몽은 명백히, 또 열정적으로 제시될 수 있다. 그러한 상호관계를 이끌어 내기 위해서 그는 활력 있는 강의 형태를 선호했다. 그러한 상호작용은 학생들 사이에서도 발생해야 한다고 했다.
시민대학에서 그룬트비는 학생들로 구성된 회의 구조를 구상했는데, 구성원들 사이에서 상호작용의 방식으로 문제가 결정되는 것을 중시했다. 이것이 상호작용의 두 번째 형태다. 그룬트비는 놀랍게도 아무런 프로그램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는 모든 것이 현재적 과정에서 상호작용을 통해 이루어지기를 바랐다. 책보다는 훌륭하고 정직한 마음, 건전한 상식, 좋은 귀, 좋은 입을 중시했다.
상호작용의 세 번째 형태는 방랑시인과 청년들 사이에서 발견했다. 방랑시인들은 진실한 자연 속에서 영감을 얻어 모국어로 노래하는 시인들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삶을 위한 학교는 역사적이 시적인 학교라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그룬트비는 모국어를 삶의 계몽을 위한 핵심 요소 가운데 하나로 여겼다. 그는 식자층이 사용하는 라틴어와 독일어에 덴마크어를 대비시키면서 모국어의 권리를 위해 싸웠으며, 또한 학구적 문화에 민속 문화를 대조시키면서 그 가치를 옹호했다.
최초의 시민대학은 1844년 독일과 대립 관계에 있던 슐레스비 지방 최북단 뢰딩(Rødding)에서 애국심을 고양시키고 젊은 농부들의 능력을 향상시킬 목적으로 세워졌다. 이 학교는 그룬트비 사상을 모형으로 세워졌으나 그룬트비가 설립에 관여하지는 않았다. 그는 교회와 교육과 정치에서 새로운 대중운동의 핵심 위치에 있기는 했지만 조직가나 정당의 지도자로 나서지는 않았고 다만 운동의 정신적 지도자로 여겨졌다. 그룬트비는 슐레스비 북단 지역에서 열린 대중 집회에서 국민들이 모국어를 잘 지키고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고 역설하면서 시민대학 설립을 위한 용기를 고취시켰다. 그가 의도한 것은 덴마크어를 듣고, 토론하며 즐기고, 정치적 자리에서 자기 의견을 개진하는 능력이었다. 그 요지는 그룬트비를 존경했던 요한 베게너(Johan Wegener) 교장이 말한 학교 목표에 잘 나타나 있다.
젊은이들은 이곳에서 명료하고 분명하며 올바르게 말하고 생각하고 쓰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러나 이 배움은 민족주의적이고 대중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져야만 한다. 젊은이들의 심장은 조국과 조국의 언어 그리고 조국의 역사와 전통에 대한 사랑으로 젖어 있어야 하며, 민족의 장점뿐만이 아니라 단점도 알고 있어야 한다. 이것 없이는 모든 배움을 실패하고 말 것이다. 이것 없이 영혼은 형성되지 않고 마음의 발전도 없을 것이다. 이것 없이 소작농은 공동체에서 독립하지 못할 것이다. 이것 없이 소작농은 모든 사람들에게, 심지어 적들에게도 그들이 자신의 적인지를 알면서도 의지만 할 것이고 모든 일에서 그들의 도움에 기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