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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의 자유교육<9>

리첫 2020. 8. 26. 18:00

 

 

 

 

뢰딩 시민대학은 덴마크 남부에서 애국심을 고취시키기 위한 전초기지가 되었으며, 1865~1920년에는 애스코우(Ascov) 쪽에 자리를 잡았다. 시민대학은 처음부터 소작농들과 다른 계층 간의 평등을 목표로 삼았는데 그룬트비가 바라던 바였다. 그룬트비가 뢰딩 대학을 방문한 적은 없으나 이 학교의 발전을 위해 힘을 보탰고, 역대 교장들은 그오 상의를 거쳐 취임했다. 초기 시민대학들은 그룬트비와 관련을 맺고 있는 이들이 설립했는데, 후대를 위해 결정적 모형이 되었던 최초의 대학은 1851년 크리스텐 콜이 설립한 학교다. 시민대학은 1863년에 15개로 불어났고, 1865년과 1867년 사이에는 25개 학교들이 추가되었다. 동시에 북유럽 다른 나라들로도 확산되었는데, 노르웨이에서는 1864, 스웨덴에는 1867, 핀란드에서는 1889년에 최초로 세워졌다. 그 사상에 대한 관심은 20세기에 들어서도 영국, 독일을 비롯한 유럽 여러 나라와 북미, 남미, 아프리카 탄자니아 등지에서도 커져 가고 있다.

 

그룬트비는 교육에 관련된 모든 글에서 교육의 제반 형태를 두루 다뤘지만, 아동교육에 관한 체계적 저술은 내놓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의 사상은 덴마크의 아동교육에도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룬트비가 아동교육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청년 시절 가정교사 일을 비롯한 교육 경험과 관련이 있다. 이때 그는 기존의 교육에 많은 의문을 품었다. 그가 보기에 당시 학생들이 받던 교육은 상당 부분 기계적 암기법과 생기 없는 교수 자료로 채워져 있었고 학생들은 게으르고 무관심했다. 그 상황은 이원화된 제도 아래 상층부나 서민들을 위한 교육 구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룬트비는 이를 전통적 교수법의 한계, 혹은 국민 대중을 위해 국가가 도입한 의무교육제도의 한계 때문에 발생한다고 보았다. 그는 당시의 의무교육제도가 다만 국가의 도구로서, 국민을 국가권력이 바라는 바에 따라 조련시키는 강제적 훈련기관(forced training institution)에 지나지 않는다고 호되게 비판했다. 따라서 이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학교로 단정 지으면서 삶을 위한 학교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인간 정신의 창조적 가능성을 발현시키기 위함이었다.

 

그는 아동들에게 지식뿐 아니라 시민 의식(citizenship)을 길러주고자 했으며, 최선의 학교란 선량한 시민을 기르는 집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교육의 목적이 그러하다면 교육의 내용과 방법도 기존과는 확연히 달라야 했다.

 

그러한 교육의 자리란 바로 부모와 교사가 자발적 의사에 따라 설립한(국가가 강제하지 않는) 자유학교나 집에서 부모가 자유롭게 시행하는 교육을 뜻하는데, 그룬트비는 학교보다는 집에서 하는 교육을 좀 더 이상적이라고 보았다. 부모는 이런 교육에서 책임을 져야 하고, 국가는 이를 함부로 가로막아서는 안 된다고 했다. 하지만 실제로 홈스쿨링은 소수만이 선택했고, 대부분은 자유학교를 이용했다. 이후에 세워진 자유학교들은 그룬트비와 콜, 그리고 그룬트비 노선에 서 있던 이들이 깔아 놓은 기초 위에서 운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