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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의 자유교육<11>

리첫 2020. 9. 2. 12:33

 

 

 

크리스텐 콜(Christen Mikkelsen Kold: 1816~1870)

 

크리스텐 콜은 구두업자의 아들이었다. 그는 교사수업을 받긴 했지만, 자신이 행하는 살아 있는 인격적 수업의 관점을 근거로 하여 당시에는 절대적이었던 효과적인 주입식 교육에 맞서 공립학교에서 공식적인 교사 생활을 하지 않고 여러 곳에서 수년간 가정교사와 야간학교 교사로 일했다. 1851년에는 뤼스링(Rysling)에 시민대학을 세웠고, 그후 댈뷔(Dalby)에 자유학교를 세웠다. 콜이 54세에 숨을 거두었을 때, 그는 시민대학의 위대한 지도자로서 덴마크 전역에 널리 알려졌다.

 

크리스텐 콜은 문필가는 아니었다. 그는 인격적인 참여와 살아 있는 말로써 교육을 행했다. 이러한 교육적 영감은 기록하는 게 아니라 입으로 전하는 방식으로, 살아 움직이는 형태로 전승되었다. 이런 방식은 오늘날 프리스콜레에도 여전히 살아 있다. 저서로는 어린이 학교라는 짧은 작품 하나를 남겼을 뿐이다. 이 소책자는 그가 숨을 거두고 난 1850년에 출간되었다. 그가 남긴 인상 깊은 한 구절을 인용한다.

 

참된 수업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다음 두 가지가 충족되어야 한다. 첫째, 교사의 자질은 사랑과 당면 주제에 대한 살아 있는 흥미에 기초해야 한다. 그래야만 학생이 스스로를 열어 살아 있는 말이 갖는 신비한 힘을 통해 교사가 의도하는 사유와 개념을 빨아들일 수 있게 된다. 둘째, 학생이 저마다의 정신적 수준에 따라 교사의 가르침을 받아들여 정신적 삶을 깨우치거나 스스로 그런 소양을 기를 수 있도록 교수와 학습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 두 가지는 정신적 결실을 맺는 데 필수적이며 교육의 근본 원칙이다.”

 

크리스텐 콜의 역사적 위치

 

크리스텐 콜은 자유학교 영역에서 그룬트비와 비슷한 비중으로 거론되어 왔다. 콜은 그룬트비의 사상적 영향권 안에 있기는 했지만 독자적 사상을 발전시켜 현실에 구현한 실천적 사상가였다.

 

콜은 구두업자의 아들로, 교사가 되기를 바라는 어머니의 품에서 자라났다. 그는 청년 시기부터 이미 공립학교 보조교사로서, 또 대농장의 가정교사로 일하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교사가 되기 위한 정규교육을 받았다. 콜의 사상 형성에는 다음 세 가지가 결정적 영향을 주었다. 첫째는 30세 중반쯤 경건주의 평신도 설교가 스케펜보어흐(Peder Larsen Skaeppenborg)의 설교에서 깊은 종교적 각성을 체험한 것이고, 둘째는 잉에만(B.S. Ingermann)의 역사소설에서 민족적 각성을 체험한 것이다. 이 두 가지 계기로 그는 30세 후반에 교사로서 어린이와 어른을 위한 교육활동에 몸바칠 것을 각오한다. 마지막 세 번째는 그룬트비의 정신세계와의 관련성이다. 콜은 비록 비록 정규 교사교육을 받기는 했지만, 아주 짧게 공립학교에 근무했고 대부분의 시간을 여러 곳에서 가정교사로 또 야간학교 교사로 보냈다. 터키의 스미르나(Smirna: 현재의 이즈미르<Izmir>)에 가서 선교사 일을 한 적이 있는데, 5년간의 체류 기간 끝에 1847년 트리스트(Triest)로 항해한 후, 손수레를 하나 사서 짐을 싣고는 1,200킬로미터를 걸어서 귀향했다. 두 달간에 걸친 이 믿기지 않는 여정에서 그는 풍부한 삶의 체험을 쌓는다. 이 여정에서 귀향한 후 콜은 헤슨펠트 목사(C.F.Hassenfeldt in Ringkobing)의 가정교사 일을 맡았는데 그때 처음으로 그룬트비의 저서를 접하게 되었다.

 

초기의 여러 영향 속에서 콜은 농촌을 자기 이상을 구현하기 위한 터전으로 삼았다. 그가 1849년 처음으로 농촌 청소년을 위한 농민고등학교를 설립한 이래 일군 성과는, 오늘날 덴마크 자유교육이라는 세계교육사에서 아주 독특하고 다채로운 양상인 시민대학과 자유학교, 자유중등학교, 자유교사대학의 원형을 처음 현실화시킨 인물로 평가하는 데 일조한다. 오늘날 모든 자유학교 양태의 성격과 역사적 위치를 정당하게 이해하자면 콜의 역사적 실천 과정의 주요 대목을 좀 더 자세히 볼 필요가 있다. 이들 다양한 자유학교들은 성격상 유기적으로 얽혀 있는데 역사적으로는 시민대학이 가장 먼저 시작되었기 때문에 여기서부터 이야기를 풀어 보기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