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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의 자유교육<13>

리첫 2020. 9. 7. 19:02

 

 

 

시간이 지남에 따라 콜은 그가 처음 사용했던 그룬트비 식의 교육과정으로부터 자기 생각에 따른 교육과정으로 옮겨갔다. 역사적-시적인 문제 대신 예수의 단순함과 형제 사랑이 핵심 사안이 되었다. 가장 강조한 것은 절제, 자기희생, 고강도의 노동이었다. 이를 그는 언어적으로 또한 일상생활의 도덕적 모범을 통해서 가르쳤는데 기독교에 대한 그룬트비의 해석과는 다른 것이었다.

 

콜의 교육과정에서 또 하나의 변화는 학생들에게 시험을 부과하려는 교육청과의 투쟁 결과에서 나타났다. 콜이 국가 재정지원을 요청하고자 교회 당국과 공립학교를 관장하는 관청에 매년 제출한 보고에 의하면, 당시 시민대학에 물리, 화학 및 측량 과목이 설치되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 과목들을 콜은 그리 중시하지 읺았다. 그는 자연과학보다는 농업을 중시했다.

 

콜이 댈뷔로 옮겨갔을 때, 부농이었던 라르슨(Christen Larsen)이 설립한 덴마크 협회를 통해 농민을 위한 성인교육의 기회를 주변 지역민들에게 제공했다. 협회 회원은 대략 80명 정도로 일요일 저녁마다 모임을 가졌다. 댈뷔에서 몇 년을 지낸 후 콜은 시민대학이 확장되기를 바랐다. 3년여 계획을 세운 후 망설이던 끝에 그는 댈뷔에 있던 시민대학을 오덴서(Odense) 곁의 댈룸(Dalum)으로 옮겼다. 프리스콜레는 댈뷔에 남아 있었다. 첫 번째 이 시민대학에 58명의 입학생이 들어왔다. 콜은 교육과정을 스스로 만들어 내고자 했다. 당시 주무 관청은 콜의 학교를 그룬트비의 종교적 선전장으로 파악했다. 따라서 지역 관청은 이 학교로부터 국가 지원금을 환수하도록 중앙정부에 요청했다. 사립대학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정부는 계속해서 지원했다. 콜이 이 싸움에서 성공을 거두었던 것이다.

 

186841일 콜은 여성을 위한 시민대학을 열었다. 최초의 시민대학 프로그램으로 30여 명의 소녀와 성인 여성이 지원했다. 시민대학의 개교는 의도적이었다기보다는 우연의 결과였다. 많은 젊은 여성들이 댈뷔의 학교를 방문했고 같이 배울 수 없는지 간청한 데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청년들은 그들의 애인과 자매들도 함께 배우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같은 수준에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부엌에서 가사를 돌보던 콜의 자매들은 소녀들에게 약간의 수공예와 가사 일을 가르쳤다. 그 외에는 청년들과 같은 내용을 배웠고 다만 농사일은 제외했다.

 

186년과 그 이듬해1869년 겨울 학기에는 백여 명의 학생들이 등록했다. 그다음 해도 마찬가지였다. 여름 학기는 여성들을 위해 개설했다. 가축을 기르고 농사를 짓는 일은 시민대학을 재정적으로 독립할 수 있도록 했다. 18702월 콜은 주무관청에 편지를 썼다. 이제 재정적으로 독립할 수 있으니 더 이상의 국가 보조는 받지 않아도 되겠다는 내용이었다.

 

콜은 1862년 자신의 시민대학을 교사를 양성(자유학교와 공립학교 모두에 해당)하는 중심 자리로 만들고자 했다. 그러나 어떤 모임에서 공립학교 제도를 잘못 공격하여 좌초하고 말았다. 1865년 여름, 교사를 위한 18일 간의 여름 과정이 개설되었고 마흔 명이 참가했다. 자유학교와 공립학교, 교사 세미나에서 몇몇 사람들이 이 과정에 참여하기 위해 왔다.

 

1870년 콜의 사후 댈룸의 시민대학은 소녀들을 위한 학교가 되었으나 학생 수는 줄어들어, 1883년 매각되었고 3년 후 기숙형 농업학교로 전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