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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가 학원을 못 이기는 이유

리첫 2020. 9. 23. 15:01

 

 

카이스트 이승섭의 교육이 없는 나라

이승섭 교수는 학창 시절 공부를 열심히 하던 모범생이었다. 세월이 흘러 이제는 학부모가 되어 아이를 키우고, 카이스트 교수가 되어 우리나라의 과학영재들을 바라보면서,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우리나라를 '교육이 없는 나라'라고 한다.

공교육 무너진 현장 vs 훌륭한 학원 선생님영재학교 출신 대신 시골 출신 A군을 뽑은 이유

흔히 ‘우리 사회에서 공교육은 무너졌다’라는 말을 자주 듣곤 하는데, 필자가 현장을 직접 목격한 상황은 다음과 같다. 

몇 년 전 필자가 지역의 한 중학교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교정에는 인조 잔디가 보기 좋게 깔려 있었고 멀리서 보이는 건물 안 교실에는 학생들이 하나 둘 자유롭게 오가는 모습도 보였다. 쉬는 시간이나 자율학습 시간이겠구나 하며 가까이 다가간 필자는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20여 명의 학생들이 수업 중인 가운데 선생님 말씀에 집중하고 있는 학생들은 서넛, 몇 명은 누워서 잠을 청하는 듯했고, 다른 학생들은 산만하게 딴 짓을 하고 있었다. 

한편으로 자유로운 분위기라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필자의 학창시절 교실에 꽉 차게 앉아 대부분의 학생들이 칠판을 주시하고 산만한 학생들에게는 선생님이 주의를 주시던 모습, 혹은 KAIST의 몰입된 강의실 분위기에 익숙해 있던 필자에게는 다소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참고로 그 중학교는 학원가 근처의 통상 좋은 학군으로 아파트 시세도 상대적으로 높은 동네에 있었다.

공교육 현장이 무너지면서, 학교에서는 꾸벅꾸벅 졸고 학원에서 입시 공부에 매진하는 풍경이 흔하다.

'세상이 변해서 그러려니' 하는 생각도 있겠지만, 필자는 같은 지역의 늦은 밤 학원가 풍경은 낮 시간 교실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학생들은 좁은 학원 강의실에 빽빽이 앉아 학원 선생님의 말씀에 집중하고, 학원이 끝나는 밤 시간이면 늦게까지 공부하다 지친 아이들을 실어 나르는 부모님들의 차량 행렬로 교통 혼잡이 일어나곤 한다. 

KAIST 입학처장 시절 면담했던 우수 신입생들 가운데 공부를 잘 하게 된 이유로 학원 선생님을 언급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사실도 언급하고 싶다. 심지어 학원에서는 학생들에게 ‘학교에서는 쉬고 학원에 와서 집중해서 공부해야 한다’며 현실적인 지침을 주기도 하고, 입시가 끝나면 유명 학원 복도에는 합격한 학생들이 감사의 마음으로 보내온 꽃 화분들이 즐비하기도 하다. 

실리콘밸리 애플 연구소의 인재가 된 A군 이야기 

교육개발원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사교육 시장은 연간 20조원으로 서울의 경우 학생 일 인당 사교육비는 45만원, 두 자녀를 둔 가정을 기준으로 월 90만원, 연 1000만원의 사교육비가 지출된다고 한다. 만일 우리 사회에서 학교 교육만으로 충분한 교육을 받고 진학을 하거나 사회에 진출할 수 있다면, 서울 4인 가정의 국민소득은 만 불이 증가되는 셈이다. 필자도 우리 교육의 현실에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학부모의 한 사람으로 사교육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하며 사교육비로 인해 많은 부담감을 느껴왔다.

필자는 오늘날 우리나라 교육 상황에서 ‘학교는 학원을 결코 이길 수 없고, 그래서 공교육은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는데 그 이유는 교육기관인 학교와 입시준비 기관인 학원이 입시준비의 장에서 경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와 교육당국이 교육을 대학 입시준비로만 이해하고 인식하고 있는 한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귀결이 아닌가 싶다.

시골학교 출신인 필자의 제자는 다양한 체험을 통해 경험의 폭을 넓혔고, 훌륭한 연구자가 되어서 실리콘밸리 애플 연구소에서 근무하고 있다.

필자는 KAIST에서 우리 사회에서 사교육으로 가장 잘 훈련된 학생들을 만나고 있지만, 역설적으로 그것이 얼마나 모래성과 같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미국 실리콘밸리 애플 연구소에 있는 A박사는 필자가 우리 교육과 관련해 자주 언급하는 제자 중 하나이다. 당시 필자의 연구실은 나름 인기가 좋아 매년 많은 학생들이 지원하였는데, 지원자 가운데 1~2명을 선택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함께 지원한 학생 중에는 영재학교를 졸업하고 KAIST에서 높은 학점과 좋은 스펙을 내세우는 경우도 있었지만, A군을 선택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시골에서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낸 A군은 지방의 B대학에 입학했고, 군 복무를 마친 후 늦게 공부에 전념해 우수한 성적으로 B대학을 졸업하고 KAIST 대학원에 입학한 경우였다. 특히, 중학교 시절 학교 당구 선수로 에버리지가 400이었다는 대목은 필자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중고등학교 시절 공부만 하고 어려운 문제만 풀었을 다른 학생들과 비교해 A군은 나름 ‘제대로’ 교육을 받았고 ‘놀만큼 실컷 놀았을 것 같다’는 기대가 있었다. 대학원에 진학한 A군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열심히 연구를 해 필자의 첫 논문 1저자가 되었고, KAIST 박사 후에는 칼텍에서 포스트닥터를 한 후 애플에 들어갔다. 필자가 A군이 제대로 교육을 받았다고 언급한 것은 역설적으로 A군이 학창시절 학업에 뜻이 없어 학업 스트레스 없이 하고 싶은 것을 하고 다양한 경험을 했을 것 같기 때문이다. 한 가지 예를 일반화한다는 반론에 대해서 필자가 덧붙이고 싶은 것은 이런 경우가 필자의 경험상 훨씬 많다는 사실이다.

학창시절 귀한 시간을 쓸데 없는 일들로 보내다니

대학입시가 인생의 목표인 학생들은 학창시절 사회에 나가서 써먹을 데 없는 내용들을 어렵게 풀고 암기하면서 귀중한 학창생활을 보낸다. 혹 대학에서는 써먹을 것이란 기대가 있을 수 있겠지만 대학교수인 필자는 ‘아니다’라고 분명히 말한다. 더구나 즐거워야 할 배움의 학창시절이 인고와 고통의 시간이었던 학생들은 대학에 들어오면 목표를 상실한 채 방황하는 경우도 일상이다. 

필자는 과거 미국 영화 속 햄버거 가게의 아르바이트하는 학생들의 모습을 보면서 ‘공부해야 할 귀중한 시간에 왜 쓸데없는 일을 시킬까?’ 의구심이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 대학입시 준비에 매몰되어 있는 우리 학생들을 보면서 ‘학창시절의 저 귀중한 시간에 쓸데없는 일들을 하고 있구나’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이제 학교는 교육의 장으로 돌아가야 한다. 필자는 그럴 수 없는 현실에서 많은 학교 선생님들이 교육 현장에서 고민하고 갈등하고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정보와 지식이 넘치고 빠르게 변화하는 4차 산업혁명시대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학생들에게 배움의 즐거움을 가르쳐 우리 아이들이 미래를 스스로 대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즉, 학생들의 머릿속에 과거의 지식을 잔뜩 집어넣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학생 스스로 새로운 지식을 찾아 나갈 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는 것이다.

4차 산업혁명으로 촉발된 교육 변혁의 필요성은 코로나로 인해 더 이상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쓰나미처럼 닥쳐온 이 강요된 변혁 속에서 우리 사회와 교육 당국이 우리 아이들이 학교에서 진정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교육 제도를 바꿀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다. 현명한 자에게 위기는 가장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글: 이승섭 교수(카이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