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마크의 자유교육<14>
콜에게 한 가지 중대한 한계가 있었다면 강한 카리스마와 압도적 리더십 때문에 동료 교사들이 종종 부차적인 존재로 전락하고, 아울러 후계자를 길러내지 못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때문에 사후 일정 정도 공백기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사람들은 그의 정신과 활동이 뜻했던 중대한 의미를 다시금 붙들면서 시민대학을 위한 새로운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이러한 콜의 사상과 실천은 오늘날 덴마크의 ‘자유교육’이라는 독특한 현상에서 원형으로 작용하고 있다.
콜이 설립한 학교는 이후 덴마크 시민대학의 모형이 되었고 영향력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그룬트비는 수차례에 걸쳐 콜을 언명했다. 스파르타적인 삶의 양식이 콜 학교의 성공 요인으로 보인다. 모두 같은 음식을 먹었고, 커피나 차도 마시지 않았다. 설탕도 거의 먹지 않았다. 스프 한 접시에는 땅콩 한 알만 들어 있었다. 콜과 동료 교사는 침실을 같이 썼고 종종 두세 명의 학생들이 같은 매트리스를 썼다. 모두가 하루 종일 같이 있었으며 가족공동체 같은 분위기를 나누었다. 콜은 단순한 농민복을 걸치고 살았고 학생들에게는 청결과 질서를 요구했다. 학교 수업은 농한기인 겨울 다섯 달 동안으로 제한했고 나머지 시간에는 일을 했다.
콜의 활동은 농민들에게 광범위한 영향을 끼쳤다. 한때 콜의 제자였던 자유학교 교사들의 활동을 통해서, 시민대학의 책임자 역할을 통해서, 그리고 교사집단의 활동을 통해서 영향력이 번져갔다. 그룬트비의 후광은 콜의 활동 전체에 깔려 있다. 그룬트비는 콜의 학교에 권위를 부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룬트비의 젊은 추종자들은 1864년 이후 시민대학을 설립하면서 콜의 실천적 사례에 매우 고취되었다. 1870년 콜이 죽었을 때 그는 1,300명의 학생들을 가르친 스승이었을 뿐만 아니라 향후 학교의 살아 있는 원천으로서 영감을 불어 넣은 사람이 되었다. 학생들뿐 아니라 목회자와 평신도 모두가 그를 사랑했다.
콜은 자유학교 교육이념에서 자유, 평등, 사랑이라는 세 가지 기본 축을 설정했다. 그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콜의 기독교 경건주의적 신앙 체험의 요체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앞서 경건주의 설교자와의 만남을 거론했는데, 요컨대 스케펜보어흐가 “우리 주님이 인간을 사랑한다.”는 말씀을 전했을 때, 그는 기독교 복음의 핵심에 도달했다.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한다는 사실, 그리고 내가 나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인식은 콜에게 자유를 체험하도록 했던 것이다. 이 개인적인 체험은 추후 그의 생애 전체의 방향을 결정했을 뿐 아니라, 나아가서 자유학교의 성격을 규정하게 되었다. 이는 콜이 기독교를 어떤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평등과 자유를 포괄하는 살아 있는 전제로 받아들였음을 뜻한다. 세계관이나 교육 프로그램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살아 있는 전제에 따라 교육을 추구하고, 아이들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아이들이 먼저고 방법은 나중에 온다는 뜻이다. 기독교란 삶의 입장이지 의견의 집합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부는 이런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다. 그렇다고 아이들에게 신앙을 강요하지는 않았다. 이 문제는 삶의 진지한 교류와 대화로 풀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유가 자유학교의 전제라면, 그 방법도 자유롭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이다. 오늘날 덴마크 자유학교 전반에서 종교 수업은 기독교 신앙을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대화 구조로 기독교뿐 아니라 세계의 다양한 종교를 배우게끔 하는 구조를 지향하고 있다. 이는 콜의 전통에 따른 결과로 판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