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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의 자유교육<17>

리첫 2020. 10. 10. 13:51

 

 

 

 

덴마크 자유교육운동의 사상적 배경(2)

 

한편 민족주의는 특수하고 지역적인 것을 추구하려는 낭만주의적 특징과 연관되어 나타난 정신적 태도라 할 수 있다. 통일된 중앙정부를 갖지 않고 작은 나라들로 구성된 일종의 연방적 정치구조 속에서 살아가던 독일인들은 계몽주의자들의 보편 이성이 파악해 낸 역사관에 공감할 수 없었다. 이들은 한민족의 의미와 가치는 민족 외부에 존재하는 보편적 척도로 가늠할 수 없고, 다만 민족 자체가 가진 고유성에 의해서 비로소 드러난다고 보았다. 요한 고트프리트 폰 헤르더(Johan Gottfried von Herder, 1744~1803)가 대표적 주자였다. 그는 칸트의 보편주의적 사고를 거부하고 자국 문화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한 과제를 설정했는데, 이를 위한 중요한 도구를 언어로 보았다. 언어는 한 문화권의 사고를 결정짓는 문제로 파악되었고, 그 언어란 모국어를 뜻했다. 이 과제와 관련해 문헌학 연구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헤르더는 토착 문화의 존재가치를 입증하고자 열심히 민요를 수집하였고 그런 맥락에서 민속적 전통도 열렬히 옹호했다. 또한 영국의 셰익스피어에 필적할 만한 독일만의 문학을 꽃피우고자 했다. 젊은 시절 괴테의 작품세계는 그러한 관심사와 맞닿아 있었다. 헤르더는 이러한 일련의 노력으로 근대 인류학의 토대를 닦은 사람이 되었다.

 

낭만주의와 민족주의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주요 모티브 중 하나는 유기체적 사고다. 이는 개체와 사회를 하나의 커다란 생명적 전체 속에 연관 되어 있는 통합체로 보려는 것이다. 민족은 하나의 살아 있는 유기체로서 그 내적 법칙에 따라 탄생하고 성장하고 쇠퇴하는 자연적 과정을 따른다는 견해다. 따라서 모든 민족은 각기 고유한 역사를 갖는데, 연속적이고 직선적인 계몽주의적 역사관과는 다른 것이었다. 계몽주의 사고 형식의 문제점이라면 개인들의 경험 세계 외부에 추상적인 총체성을 설정하는 것으로 자칫 전체주의적 사고로 귀결될 수 있다는 데 있다. 하지만 헤르더는 유기체적 사고를 극단적인 형태로 밀고 가지는 않았다. 이는 최대한 외부적 강제 체제로부터 독일 민족의 독자성을 드러내고자 했던 노력의 표현으로, 종종 민족들 간의 폭력적 갈등을 조장했던 배타주의적 태도와는 무관했다.

 

낭만주의와 민족주의의 주요 모티브는 그룬트비의 정신세계에서 두루 찾아볼 수 있다. 그의 북유럽 신화 연구, 덴마크 역사와 모국어에 대한 사랑, 조국을 주제로 한 노래와 시편, 농민과 평민의 삶과 문화적 역량에 대한 가치 인식, 민담과 민요 수집 같은 주제들이 그것이다. 하지만 그룬트비를 낭만주의자나 민족주의자라 부르기는 어렵다. 그는 조국을 뜨겁게 사랑한 사람이었지만 전통적 의미에서 민족주의자나 국수주의자는 아니었다. 타국에 공격적이거나 팽창주의와도 무관했다. 그는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의 문화적 연대를 강조했지만 1840년대와 1850년대 젊은 자유주의 계열의 학자층이 추구했던 범스칸디나비아주의와는 명백히 거리를 두었다. 이는 그룬트비가 계몽주의와 경건주의, 자유주의의 정신적 분위기 속에서 살았지만 그를 어떤 특정한 ‘~주의자로 규정하기 어려운 점과도 통한다. 이는 콜의 경우도 비슷하다. 콜은 경건주의의 직접적인 영햔권 아래에서 살았고 또 거기서 깨달은 것을 교육에 반영했짐나 매우 엄격했던 독일의 전통적 경건주의 교육학과는 달리 아동의 자유에 역점을 둔 교육을 구현코자 했으며, 이런 점에서 경건주의 교육학으로 부르기 어려운 점이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흡사 계몽주의 정신에서 자라난 박애주의(Philanthropinismus) 교육적 풍미가 물씬 풍기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