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교수법이 중요한가?
대학에 입학할 학생수가 급감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학생이 원하는 대학을 선택할 수 있는 우선권이 커질 수 있다. 학생들은 무엇을 보고 대학을 선택할까? 대학의 지명도? 교수들의 연구실적? 수업품질? 취업률? 그렇다. 학생들은 수업 품질이 좋은 대학, 취업이 잘 되는 대학을 선택할 수 밖에 없다.
입학한 후에는 어떤 수업을 선택할까? 역시 자신이 필요로 하는 내용을 다루는 수업, 품질이 좋은 수업을 선택할 것이다. 앞으로 교수들의 수업평가제가 정착되면 수강신청 대상 수업명 옆에는 담당 교수 이름과 지난 학기 학생들이 매긴 수업평가 점수가 나란히 적히게 될 것이다. 학생들은 이걸 보고 당연히 수업평가가 좋은 과목을 수강하려 할 것이다. 대학의 상품은 수업이고, 그 수업의 품질이 경쟁력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앞으로는 잘 가르치는 대학, 잘 가르치는 교수만이 살아남게 된다. 그래서 교수법이 중요한 것이다.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
‘나’, ‘지금’, ‘여기’를 벗어나라
사람은 누구나 생각이라는 자신만의 특별한 안경을 쓰고 살아간다. 이처럼 세상을 보는 관점이나 사고의 틀을 패러다임이라고 한다. 교수법을 혁신하려면 수업을 바라보는 틀을 새롭게 해야 한다.
패러다임에는 두 가지 축이 있다. 하나는 시간의 축이다. 어제의 패러다임, 오늘의 패러다임이 그것이다. 어제의 패러다임으로 오늘을 보거나, 오늘의 패러다임으로 어제를 보면 문제가 생긴다. 과거의 지도로 오늘을 여행할 수 없는 것처럼, 어제의 패러다임으로 무장한 사람이 오늘을 살아갈 사람은 없다.
다른 하나는 공간의 축이다. 이곳의 패러다임, 저곳의 패러다임이 그것이다. 이곳의 패러다임으로 저곳을 보거나, 저고의 패러다임으로 이곳을 볼 때 문제가 생긴다. 해외에 나가면 그곳의 패러다임으로 살아가야 한다. 미국의 교육 시스템을 우리나라에 그대로 적용하려면 문제가 생긴다.
패러다임은 경험, 습관, 같은 내적 요인과 문화, 환경, 교육 같은 외적 요인 때문에 형성된다. 이러한 내적, 외적 요인의 영향에서 벗어나야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바르고 새롭게 볼 수 있다. 토머스 쿤은 그의 저서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과학사에서 대부분의 획기적 발견은 먼저 전통, 기존의 사고방식, 낡은 패러다임을 파괴하는 것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했다. 아인슈타인도 “우리가 직면한 중대한 문제들은, 그 문제들을 발생시킨 당시에 가지고 있던 사고방식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고 했다. 그는 “상식이란 우리가 18세까지 배우는 편견과 선입관의 총체,”라면서 썩은 뿌리에서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음을 강조했다.
낡은 패러다임을 깨고 나와야 새로운 세계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고정된 시간과 공간의 패러다임 속에 갇혀 살아가려 한다. 우리가 패러다임을 바꾸지 않으면 모든 기준은 ‘나’, ‘지금’, ‘여기’를 벗어나지 못한다. 패러다임을 바꿔야 ‘너’, ‘내일’, ‘저기’도 기준이 될 수가 있다. 패러다임에서 벗어나려면 습관, 과거 경험에 대한 맹신, 문화나 교육의 틀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사고를 틀 안에 가두고 변화하지 못하게 막는 주범이다.
교육이란 학생에게 패러다임을 만들어주는 작업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한편 교육이란 굳어 있는 패러다임을 깨는 작업이기도 하다. 교수들은 학생들을 ‘나’, ‘지금’, ‘여기’라는 틀에 가두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 틀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좋은 교수법이다. 그러자면 교수 자신이 먼저 ‘나’, ‘지금’, ‘여기’라는 틀에서 벗어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