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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의 자유교육<38>

리첫 2020. 11. 26. 14:19

 

 

 

 

죈더 비움 자유학교(Sdr. Vium Friskole)

 

공립학교에서 자유학교로

 

1970년대 중반 덴마크 아동 인구가 급격히 감소했다. 서유틀란트(Western Jutland) 반도의 인구 밀도가 희박한 농촌 지역에서는 더 두드러졌고 죈더 비움 지역도 예외는 아니었다. 1960~1976년에 이 지역 학교에서는 7학년까지 총 140여 명의 학생만이 있었다. 출산율이 급격히 떨어지기 시작하면서, 학교 구조에 대한 논쟁이 격렬하게 일어났다. 그리고 심한 어려움에 봉착한 학교들로부터 여러 가지 제안들이 쏟아져 나왔다. 도시 아이들을 농촌으로 보낼 의향은 없냐는 등 격렬한 논쟁이 일어났다. 이 와중에 아이들의 입장은 잊혀졌다. 왜냐하면 아이들은 어디서나 잘 적응할 수 있기 때문에! 특별히 홈스쿨링을 생각하고 있지 않은 경우에는, 학교를 새롭게 만드는 것 외에 다른 가능성이 희박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교육의 대안적 형태를 추진하도록 압박했다.

 

그리고 학부모들이 왔다!

 

일방적으로 정하지 않고 아이들의 수준과 흥미에 맞춘 교육과정, 2~3개 학년이 두 명의 교사와 함께 하는 수업, 교사와 학부모의 긴밀한 협력, 이 모든 것은 공립학교였을 때 이미 도입된 것들이다. 우리는 여러 곳에서 격려와 칭찬을 들었지만, 우리 희망은 학교를 평균 수준 이상이면서 허가받은 학교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죈더 비움 학교는 문을 닫아야 한다는 결정이 났다. 그러자 학부모들이 나섰다! 사람들이 모여 지역의회와 공동으로 사업단을 결성했다. 목표는 기존의 공립학교를 자유학교로 바꾸는 것이었다. 사업단은 자유학교협회와 접촉을 갖고 함께 힘을 합쳐 법적 허가가 나기까지 무엇을 할 것인지 계획을 짰다. 아래는 그 과정을 설명한 것이다.

 

어떻게 가능했는가?

 

사업단은 반드시 해결해야 하는 두 가지 문제가 있었다. 학교 건물을 지방정부로부터 구입할 것인가? 그리고 기존 교사들이 안정된 공무원 신분을 포기하고 아무런 안전망도 어뵤는 자유학교에서 일하려고 할 것인가? 또 그들의 능력 유무를 제대로 검증하지도 않은 채 자유학교에서 일하게 할 것인가? 결국 학교 빚ㄹㄹ 매입하고 자유학교에서 뜻을 함께하는 직원들(청소부, 교사, 교장 등)을 열정적으로 찾아냈다.

 

하지만 아직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많이 있었다. 예컨대 넉넉한 예산이 없었다. 이런 조건에서 학교를 세웠을 때 부모들이 학비를 제대로 낼지에 대한 보장도 없었다. 이런 불확실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사업단은 설립 총회를 열었다. 그날 저녁 총회가 열린 회의장은 뜨거운 열정과 고취된 분위기로 가득했다. 자유학교를 설립하는 안에 대해 100%의 지지가 이루어졌고, 사업단은 많은 칭찬을 받으며 죈더 비움 자유학교의 초대 운영위원회로 선출되었다.

 

지역의 건실한 연대

 

이전의 학교에 다니던 약 50여 명의 아이들이 모두 자유학교에 지원했고, 새로 선출된 운영위원회는 지역 착수금을 걷기 위해 팔을 걷어붙였다. 모든 것은 생각보다 잘 진행되었다. 그리고 지역 공동체는 견고한 연대 활동으로 자기들의 학교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모두가 이런 기쁨에 동참한 것은 아니었다. 지방정부 교육청과 몇몇 정치인, 다른 지방정부 공립학교 교사들은 우의 이런 발전을 고깝게 보았다. 이들은 우리를 흥미로운 대안으로 보기보다는 공립학교에 대한 위험스런 경쟁자로 보았다. 현재 지방관청과의 관계는 정상화되었지만 우리가 그들의 아이를 빼앗아 간다고 생각하는 이웃 학교들도 여전히 있다.

 

자유학교를 시작할 때는 일이 엄청났다. 그러나 그 성과와 보람은 오래지 않아 나타났다. 학부모들이 학교 일에 참석하기 시작했고 지역 공동체가 함께 일을 도모했기 때문인데, 이전에는 전혀 찾아볼 수 없던 일이었다. 우리는 돈이 없었다. 하지만 자원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활용할 수 있게 되었고, 이것은 자유학교에 엄청난 이득을 가져왔다.

 

아이들은 그 학교가 자기들의 학교임을 느끼게 되었다. 지역 공동체에서 모든 사람들은 시설물 수선과 정돈 등 필요한 일을 위해 쉬는 토요일을 기꺼이 반납했다. 학교는 지역의 문화중심지가 되어야 하며 학교가 속한 지역의 모든 사람들은 언제든지 학교에 와서 편안함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높은 요구 수준

 

자유학교 교사들에게는 높은 수준이 요구된다. 만일 여기에 미치지 못하면 마치 건강지표에 미달하면 조치가 필요하듯 면직까지도 감수해야 한다. 자유학교에서 일한다는 것은 단순한 직업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삶의 길을 선택함을 뜻한다.

 

학생 수는 거의 배로 불어났다. 우리는 이웃마을에서 아이들을 우리 자유학교에 보내기 시작했다는 사실에 매우 기쁘다. 처음 학교를 시작했을 때는 규모가 아주 작았다. 그 울타리 안에서 아이들은 무척 행복해했고, 가정과 학교는 교육학적 사상이나 삶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지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학교가 커 가는 과정에서 이 점을 늘 마음속에 간직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