떡국에서 찾은 쌀의 전래 경로
벼가 주가 되는 권역은 동남아시아와 한-중-일 삼국을 포함한 좁은 권역이다. 벼는 본디 여러해살이풀이었지만 인간이 길들여 한해살이풀이 되었다. 볏과 식물의 가장 큰 특색은 줄기 가운데가 비어 있는 것이다. 줄기 가운데가 비어 있으므로 물속에서도 숨을 쉴 수 있다. 대나무도 이 볏과 식물의 한 가지다.
벼는 물을 댄 논에서 자라는 식물로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밭에서 자라는 육도(陸稻)도 있다. 이 육도가 거의 소멸한 이유는 소출이 적고 제초 작업이 어려우며 관개기술이 발전했기 때문이다.
벼의 원적지는 인도 동북부, 방글라데시, 혹은 버마로 추측하고 있다. 중국에서 벼농사를 지은 것은 약 기원전 5000년 전으로 추정한다. 중국에서 우리나라로 벼가 전래된 것은 대략 기원전 2000년 무렵이라고 한다. 이 경로에 대해서는 북방 전래설과 남방 전래설이 있어 혼선을 빚어 왔다.
아마도 우리나라 기후로 보자면 남부 지방이 벼농사에 적합해서 먼저 벼농사가 시작되었을 것이다. 북방 전래설은 육지를 통한 왕래가 일반적이라는 점에 근거를 두고 있지만 벼농사가 북쪽까지 확대된 것은 매우 늦은 시기였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북쪽을 경유해 남쪽으로 내려왔다면 처음에는 북쪽에서 벼농사를 짓지 않았다는 점이 모순이다. 그리고 아주 이른 시기에 중국의 남방과 배를 통해 왕래했음을 입증하는 자료들도 있다.
또 우리 풍습에는 이 경로를 추측할 귀중한 단서가 있다. 설날에 먹는 가래떡이 바로 그것이다. 가래떡과 같은 모양의 떡을 중국에서는 ‘영파지역의 설떡(寧波年羔)’이라고 부른다. 영파는 양자강 하류의 쌀 주산지다. 그리고 중국 대부분 지역의 설날음식에는 이 가래떡과 같은 음식이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설날에 가래떡을 넣은 떡국을 먹어야 나이를 한 살 더 먹는다고 여긴다. 이렇게 두 지역의 풍습이 같은 것으로 보아 우리 벼농사가 이 지역으로부터 전래되었다는 것을 방증한다고 보아야 한다.
때로는 다른 어떤 것보다 풍습의 유사성이 확실한 유래를 전할 수 있다. 풍습은 단시간에 전래되는 것이 아니다. 이국의 풍습이 한 지역에 자리 잡기 위해서는 교류가 꾸준해야만 한다. 그 교류는 단순한 물품이 아닌 사람 사이의 교류도 포함된다.
벼농사의 도입은 단지 볍씨만을 덜렁 가져왔다 해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특히 벼처럼 생장조건이 까다롭고 주곡으로 중심 위치에 있는 작물이라면 더욱 그렇다. 벼농사를 짓던 사람이 오가며 볍씨뿐만 아니라 농사짓는 법도 알려주었을 테고 이 땅에 와서 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풍습도 전해지고 설날에 가래떡을 먹게 되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