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헌법이 보장하는 부모의 권리
앞서 적은 것처럼 덴마크는 취학의무가 없고 아이들을 교육시켜야 한다는 교육의 의무만 존재하는 나라다. 19세기 중반에 제정된 헌법에는 교육에 관한 부모의 권리가 명시되어 있다. 교육은 반드시 학교에서만 받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도 분명히 하고 있다. 이 민주헌법이 교육에 미친 영향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크다. 헌법 정신을 바탕으로 제정된 학교교육법 제33조에는 ‘가정학습을 받고 있는 아이들은 학교교육에 참가하지 않아도 좋다’라고 규정하고 홈스쿨링을 당연한 것으로 인정하고 있다.
대안학교의 존재를 법적으로 인정하는 자유학교법(정식 명칭은 자유학교와 사립초등학교에 관한 법률)에도 부모들의 여러 권리를 명시하고 있는데, 다음과 같은 조항이 있다. 제9조: 공립 초-중학교에서 실시하는 내용에 준하는 교육을 자유학교에서 실시할 것을 요구하고 자유학교의 전반적인 활동을 감사하는 일은 해당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의 부모가 담당한다. 학부모회는 어떤 방식으로 감사를 실시할지 스스로 결정한다.
교육부의 사립학교 담당관이자 자유학교법을 만들고 개정 작업에 참가했던 한나 트라베르그 씨는 덴마크 교육을 아주 특별하게 만든 게 바로 이 9조라고 말한다. 이 조항은 교육의 주체가 국가가 아니고 부모이자 시민, 지역사회라는 의식이 뿌리내리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덴마크의 부모들은 특히 교육 선택의 권리를 보장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아이가 교육을 받아야 할 경우 세 가지 선택 가능성이 있다고 말한다. 하나는 공립학교에 보내는 것이다. 물론 공립이다 보니 학비는 거의 들지 않는다. 제2의 선택은 자유학교라고 불리는 사립학교에 보내는 것이다. 이 경우 학비는 공립학교보다는 조금 더 들지만 공립학교의 70% 정도 되는 운영비를 국가로부터 지원받는 덕분에 부모들은 별 부담 없이 마음에 드는 자유학교에 보낸다. 제3의 선택은 홈스쿨링이다. 홈스쿨링을 하는 가정이 많지는 않지만 그 권리는 오랜 세월 동안 지켜져 왔다.
위에서 말한 세 가지 선택에 더해 제4의 선택도 가능하다. 그것은 스스로 학교를 만드는 것이다. 이 경우도 앞에서 적은 것처럼 기본 조간만 갖추면 학교운영자금으로 공적보조금을 받을 수 있다. 이때 정부는 교사 자격의 유무나 구체적인 교육과정에 대한 규정, 교육 내용에 대해 전혀 간섭하지 않는다. 덴마크사립학교협회의 폴스베르그 사무국장은 이렇게 말한다. “덴마크 사회에서는 기존의 것이 자기와 맞지 않으면 대안을 선택하면 되고, 대안이 맞지 않으면 스스로가 대안을 만들면 됩니다. 이런 기회를 언제나 열어 놓는 사회제도가 있다는 사실이 매우 중요합니다.”
자유학교에서 공부하는 학생은 2000년 현재 이미 덴마크 전체 학생의 12%를 넘었고 이 비율은 조금씩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또 1990년대 이후 10년 사이에 공립학교 수는 감소하는 반면 자유학교 수는 늘어났다. 학생 수 감소로 폐교 위기에 처한 공립학교가 자유학교로 그 틀을 바꾸면서 이런 흐름은 더 빨라지고 있다.
3) 삶을 위한 학교
덴마크 사회는 시험점수로 진단하는 평가를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 아이들이 시험 때문에 시달리는 경우도 거의 없다. 폴스베르그 씨는 이렇게 말한다. “덴마크 사람들은 평등이란 말을 아주 소중하게 생각하죠. 우리는 무언가를 판단하고 실천할 때 이 단어를 잊지 않고 떠올리죠. 인간을 서열화하는 시험에 흥미를 갖는 사람도 별로 없을뿐더러 아예 실시하지도 않아요. 무엇보다 덴마크 사람들은 순위 따위는 믿지 않습니다. 영국 같이 일류, 이류로 학교를 나누고 서열을 매기는 일은 우리 사회에서는 찾아볼 수 없어요.”
물론 9학년이나 10학년이 끝날 무렵 덴마크어와 영어, 독일어, 수학, 물리학의 표준 시험을 보도록 되어 있어서 대부분의 학생들은 이 시험을 치르지만, 누구도 이것 때문에 공부를 하지는 않는다. 시험 결과가 아이들 삶에는 거의 무용지물이라, 전국적으로 일제히 시험을 치르면서 엄청난 세금을 쏟아 붓는 어리석은 짓을 왜 계속하는지 회의감이 드는 부모나 교사도 꽤 많다고 한다. 이런 부모는 대부분 자유학교를 선택한다. 자유학교 출신학생 가운데는 유치원부터 자유중등학교를 마치기까지 한 번도 시험을 보지 않은 학생도 적지 않다고 한다.
이런 흐름 뒤에는 삶을 위한 학교, 사람 중심의 교육을 표방하는 그룬트비와 콜이 있다. “나는 아이들이 음식을 제대로 씹어 먹고 있는지 확인하려고 아이들 입에 억지로 음식을 집어넣고서 토하게 하는 일은 절대 하지 않겠다.”라는 콜의 말은 자유학교에서 자주 인용된다. 이런 토양에서 자라난 그들의 휴머니즘은 경쟁 원리를 먹고 자라는 국가주의나 시장주의와 달리 자유학교가 상대적인 자율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든든한 버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