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기억력이 똑같은 것은 아니다(1)
3장에서 우리는 체스 선수들의 기억력에 관한 연구를 살펴보았다. 전문 체스 선수들은 25개 정도 되는 말의 위치를 단 몇 초 동안만 보고 완벽하게 복기해냈다. 반면 평범한 사람들은 똑같은 체스판을 보고도 겨우 5개 정도만 기억했다. 하지만 말이 무작위로 배치된 체스판을 보여주었을 때는 양쪽 집단의 기억력이 비슷하게 나타났다. 따라서 3장의 결론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체스 고수들은 일반 기억력이 좋은 것이 아니라 실제 경기에서 체스 말의 위치를 기억하는 능력이 뛰어난 것이다.’ 그런데 3장에서는 다루지 않았지만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다. 체스 고수들은 과연 어떻게 그 많은 말의 위치를 기억하는 것일까? 좀 더 일반적으로 말해, 모든 분야의 최고 성과자들은 도대체 어떻게 초인적인 기억력을 발휘하는 것일까? 프로 골퍼 잭 니클라우스(Jack Nicklaus) 는 경기 당일 자기가 친 모든 샷을 기억했다. 성공적인 경영인들이 오래전 재무제표에 나왔던 숫자들을 기억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학자들은 다양한 분야의 뛰어난 성과자들이 관련 분야의 정보를 놀라울 정도로 잘 기억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 현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번에도 대답의 일부는 체스 선수들에 관한 연구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실험은 간단한 단기 기억력 검사라 할 수 있다. 단기 기억이란 정보를 아주 잠깐 동안만 뇌에 저장하는 기억력으로, 다른 어려운 과업에 집중하면 쉽게 사라지는 경향이 있다. 수십 년 동안 축적된 연구 결과가 단기 기억 용량의 최대 항목 수는 일곱 가지다. 단기 기억력은 사람마다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실제로 모든 사람의 단기 기억력은 5~9개 항목으로 한정된다.
앞에서 언급했듯 연구자들은 말이 무작위로 흩어져 있는 체스판을 보여준 실험을 통해 체스 마스터들의 단기 기억력이 보통 수준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더 놀라운 것은 실제 경기 중의 체스판을 보여주었을 때도 마스터들의 기억 항목은 5~9개 사이로 보통 수준이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차이는 기억 항목에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연구자들은 이를 설명하기 위해 ‘청크 이론(chunk theory)’을 제안했다. 즉 실험 참가자들이 기억하는 정보 묶음(chunk)의 개수는 모두 비슷하다는 것이다. 단, 초보자들의 한 묶음은 특정 칸과 거기에 놓인 특정 말의 쌍으로 이루어진 반면, 고수들의 한 묶음은 특정 배열 안에 포함된 모든 말과 그 위치로 이루어졌다. 한 묶음에 담긴 내용은 체스 고수들이 훨씬 많다는 말이다.
문자와 단어의 차이를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예를 들어, 당신은 알파벳을 구성하는 26개의 문자는 전부 안다. 하지만 그 알파벳 조합으로 만들 수 있는 모든 단어를 알지는 못한다. 가령 누군가 당신에게 ‘lexicographer’라는 단어의 문자들을 조합해 5초 동안 보여준 뒤 순서대로 기억하도록 요청했다고 가정해 보자. 당신은 그저 한 묶음의 문자들을 보았을 뿐이기 때문에 일곱 개 정도의 문자를 기억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이 문자 배열을 하나의 단어로 접한다면 훨씬 쉽게 순서대로 정확히 기억할 수 있다. 5초도 필요없다. 0.5초면 충분하다. 잠깐 생각은 해야겠지만 뒤에서부터 거꾸로 기억하는 것도 가능하다.
청크 이론은 대단히 설득력 있고 매우 유용하면 따라서 광범위한 분야에 적용할 수 있다. 정상급 체스 선수들, 더 나아가 어느 분야든 최고 성과자들의 기억 묘기(memory feats, 완전 기억 능력이라고도 함)가 그렇듯 청크 이론에도 문제는 있다. 청크 이론은 말들의 위치를 곧바로 기억해 내는 단기 기억력에 대해서는 훌륭하게 설명한다. 이때 프로 선수들은 청크의 규모를 확장해 타고난 기억력의 한계를 극복한다. 하지만 단기 기억은 절대 오래 지속되지 않을 뿐 아니라 다른 곳에 신경을 쓰면 이내 지워져 버린다. 이것이 일상에서 전화번호를 적어두는 이유고, 전화번호는 듣는 순간 벨이 울리면 그 번호를 다시 기억하기 힘든 이유다.
하지만 열 경기를 동시에 눈을 가리고 하는 체스 선수들을 생각해 보라. 이들이 열 개의 체스판을 동시에 전부 단기 기억 저장소에 저장할 수는 없다. 그렇게 하면 다음 체스판으로 이동할 때마다 직전에 생각했던 것을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장기 기억 저장소를 통해 체스 시합에서 사용할 수 있을 만큼 빠르고 확실하게 정보를 저장하고 꺼내 쓰는 일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체스 선수들은 도대체 어떻게 하는 것일까? 이 질문의 대답은 체스 고수들의 뛰어난 실력뿐 아니라 최고 의사들의 진단, 프로그래머들의 소프트웨어 개발, 건축가의 설계, 경영자의 전략 선택, 그리고 그밖에 뛰어난 성과자들의 성과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