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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IT<6>--제2장: 우리는 왜 재능에 현혹되는가?(1)

리첫 2023. 2. 8. 08:36

 

 

2: 우리는 왜 재능에 현혹되는가?(1)

 

심리학자가 되기 전에 나는 교사였다. 그때 아이들을 가르쳤던 교실에서 재능만으로는 성취가 보장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목격했다. 비스트라는 이름을 듣기 전의 일이었다.

 

나는 27세에 정규 교사로서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뉴욕 미드타운에서 파란 유리 외벽의 초고층 건물에 자리한 세계적 경영컨설팅 회사인 맥킨지(McKinsey) 뉴욕사무소를 그만둔 지 한 달 뒤의 일이었다. 맥킨지의 동료들은 내 결정에 어리둥절해했다. 내 또래 대부분이 입사하고 싶어 안달이고, 세계에서 가장 명석하고 영향력 있는 기업으로 늘 이름을 올리는 회사를 왜 떠나는지 의아해했다.

 

지인들은 내가 주당 근무시간이 80시간이나 되는 직장과 좀 더 여유 있는 생활을 맞바꿨다고 짐작했지만, 교사를 해본 사람이라면 세상에서 교직보다 힘든 직업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 것이다. 그렇다면 왜 맥킨지를 그만뒀을까? 어떻게 보면 내가 잠시 둘러 온 길은 교직이 아니라 컨설팅이었다. 나는 대학에 다니는 동안 줄곧 인근 공립학교 아이들에게 개인지도를 해주거나 멘토가 돼주었다. 졸업 후에는 무료 학력 신장 프로그램을 만들어 2년 동안 운영했다. 그 후에는 옥스퍼드대학교에서 난독증의 신경학적 기제에 대한 연구로 신경과학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래서 교사 생활을 시작했을 때 비로소 제자리로 돌아온 느낌이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갑작스러운 변화였다. 한 주 만에 내 월급은 정말? 월급을 이렇게 많이 줘?’ 수준에서 ! 이 도시의 교사들은 도대체 어떻게 먹고 살아?’ 수준으로 떨어졌다. 저녁식사는 고객에게 청구할 비용으로 주문한 초밥이 아니라 숙제를 채점해가며 급히 먹는 샌드위치로 바뀌었다. 출근할 때 타는 전철 노선은 같았지만 미드타운을 지나 남쪽으로 여섯 정거장을 더 가서 로어 이스트 사이드(Lower East Side)에서 내렸다. 옷차림도 구두와 진주 목걸이, 정장 대신에 온종일 서 있어도 편한 신발과 분필 가루가 묻어도 상관없는 옷으로 바뀌었다.

 

내가 가르쳐던 학생들의 나이는 12~13세였다. 학생 대부분이 세련된 카페가 곳곳에 생겨나기 전의 A비뉴에서 D애비뉴에 몰려 있는 저소득층 주택단지에 살았다. 내가 근무하기 시작한 첫 학기에 우리 학교는 가난한 도시 지역의 학교를 소재로 한 영화의 세트장으로 선정되기까지 했다. 내 임무는 학생들이 7학년 수학책에 나오는 분수와 소수, 대수학과 기하학의 가장 기본적인 개념들을 배울 수 있게 돕는 것이었다.

 

첫 주부터 다른 급우보다 수학 개념을 쉽게 습득하는 학생들이 눈에 띄었다. 반에서 가장 재능 있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은 기쁨이었다. 그들은 말 그대로 이해가 빨랐다.’ 능력이 부족한 학생이라면 파악하기 힘든 수학 문제의 기본 양식을 내가 일러주지 않아도 알아챘다. 칠판에 문제를 한 번만 풀어주면 알겠다!”라고 말하고는 다음 문제를 혼자 힘으로 정확하게 풀어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성적표가 나갔을 때 수업 시간에 두각을 나타냈던 학생들 중 일부는 기대했던 만큼의 성적이 나오지 않았다. 물론 잘한 학생도 있었다. 하지만 능력이 뛰어난 학생들 중 적잖은 수가 그저 그런 성적을 받았다.

 

반면에 처음에 고전했던 학생들 중 다수는 내 예상보다 좋은 성적으로 거뒀다. 과잉성취자overachiever)’들은 매일 준비물을 확실히 챙겨서 수업에 들어왔다. 장난을 치거나 창밖을 내다보는 일 없이 필기를 하고 질문을 했다. 처음에 이해하지 못한 내용을 몇 번이나 다시 들여다보았고 가끔은 점심시간이나 오후 선택과목 시간에 도움을 청하러 오기도 했다. 그들의 노력은 성적으로 나타났다.

 

적성(aptitude)이 학업 성취를 보장해주지는 않는 듯했다. 수학적 재능과 수학 과목에서의 탁월성은 다른 이야기였다. 내게는 놀라운 일이었다. 수학은 아무리 해도 안 되는 학생이 있고, 재능을 가진 일부 학생이 앞서는 과목이라는 것이 사회적 통념이다. 솔직히 나도 그런 가정을 갖고 첫 학기를 시작했다. 수학을 쉽게 이해하는 아이들이 당연이 급우들을 계속 앞지를 줄 알았다. 사실 수학적 재능을 타고난 아이들과 나머지 성적 차이는 시간이 갈수록 벌어지리라고 예상했다.

 

나는 재능에 현혹되어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어려운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기 시작했다. 한 단원의 수업을 끝냈는데도 개념을 명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고전하는 학생들은 시간이 좀 더 필요했던 것일까? 수업 내용을 더 잘 전달해줄 다른 설명 방식을 차아야만 했을까? 재능이 없는 것은 어떻게 해줄 수 없다고 속단하기 전에 노력의 중요성을 고려해야만 했을까? 그리고 학생들과 내가 좀 더 지속적으로 노력할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 교사로서의 내 책임이 아니었을까?

 

그런 고민과 함께 성적이 나쁜 학생도 정말 흥미가 있는 이야기를 할 때는 얼마나 똑똑해 보였는지 되돌아보았다. 아이들은 각종 농구 통계, 정말 좋아하는 노래의 가사, 최신 드라마의 복잡한 줄거리 등 나는 따라잡기도 힘든 대화를 술술 나눴다. 학생들을 좀 더 파악하면서 그들 모두가 매우 복잡한 일상을 영위하고 다양한 지식에 통달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런데 방정식에서 X 하나를 구하는 일이 그토록 어렵다는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