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및 정리: 리처드 황(010-8865-0582)
예로부터 일본은 동북아시아의 환태평양에 위치한 도서국가(섬나라)인데, 세계사의 전체적인 흐름으로 볼 때 서구보다 1~2걸음 뒤처질 수 밖에 없는 지정학적 운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인들은 항상 그들의 창조적인 에너지를 발휘하여 왔다. 그것은 능동적으로 서구문화의 여러 요소를 도입하여 다른 선진국의 문화와 동등한 국민문화를 창출해 냄으로써 가능한 일이었다. 일본역사를 전체적으로 조명해 보면, 외국인들이 근대화 과정에서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그 공헌의 특히 유명한 것은 오야토이 가이코쿠진(문자그대로, 고용된 외국인이란 말)에 의하여 에도시대(토쿠가와 바쿠후) 말기부터 메이지 시대 초기(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전반까지)까지 일본은 쇄국정책에 종지부를 찍고 서구의 선진문화를 도입하므로써 근대화의 거대한 계획을 착수한 것이었다. 이 시기에 엄청나게 많은 숫자의 외국인들, 즉, 외교관, 사업가와 선교사들이 일본에 속속 입국하였는데, 그들 중 대부분이 유럽인 또는 미국인이었다. 그들은 강력한 봉건영주들이 집권한 토쿠가와 바쿠후와 메이지 정부에 의해 초빙되었다. 이 시기에 이렇게 엄청난 숫자의 외국인 유입은 일본사에서 전례가 없을 정도의 규모였다. 실로 그들은 일본의 근대화를 향한 열망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868년에 토쿠가와 바쿠후를 대신하여, 서구문화의 유입을 통하여 일본을 조속히 근대화 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메이지 정부가 집권하였다. 신정부는 토쿠가와 정부 말기에 그들이 이미 체험하였던 외국의 전문가, 자문역을 고용하는 정책을 계승 및 발전시켰다. 당시 일반적으로 외국인은 군사학, 서구의 발전된 공업 및 의학 분야에 한정하여 고용되었다. 그러나 메이지 시대의 초기에 그들의 활동범위는 엄청나게 확장되었다. 정치, 법률, 외교문제, 재정정책, 교통, 통신, 건설 및 토목공학, 토지개혁, 과학, 교육, 예술과 음악 등 거의 모든 분야에 외국인이 고용되었다.
1872년에 츄가이도라는 토쿄의 출판사에서 소책자를 발간하였는데, 그 책이름이 오야토이 가이코쿠진 세메에,큐료,키겐, 쇼쿠무이치란( 외국고용인의 이름, 급료, 체재기간 및 직무일람)이었다. 이 책에서 일본의 근대초기, 소위 "문명개화기"에 "오야토이 가이코쿠진"이라는 용어가 유행이 되었음을 우리는 알 수가 있다. 접두사 "오"는 정부라는 의미인 "오카미"에서 따 왔고, 거기에 "야토이"라는 단어가 붙어서 생긴 말이고, 이 외국인들은 새로운 메이지 정부에 의해 고용된 외국인을 지칭하는 용어였다. 이러한 임명은 일본의 메이지 정부가 관료주의 확립에 큰 비중을 두었는가를 보여주는 실례이다.
메이지 정부에 고용된 외국인의 숫자는 1874~1875년 경에 약 520명에 달하였다. 1880년 쯤에는 약 360명 정도였는데, 그 이후에 계속 감소하였다. 그러던 중, 외국인들은 또한 교사, 기업 등과 같은 사적부문에도 고용되었고, 그 숫자가 1874년, 126명에서 1892년, 572명으로 점차 증가하였다. 이 외국인들 또한 일본의 근대화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위로부터의 근대화, 즉, 메이지 정부 초기에 시작된 정부주도의 근대화에 있어서 여러 분야에서 매우 중요하달 역사에 길이 남을 공헌을 한 사람들은 다름 아닌 바로 고용된 외국인 그들이었다. 메이지 정부에 고용된 외국인의 숫자는 대략 3,000명 정도 였다. 위로부터의 근대화라는 측면에서 보면, 외국인이 가장 활약을 많이 했던 시기는 메이지 초기부터 1890년대까지 였다. 그 시기는 다소 1870년에 고무쇼(산업기술성)가 설치되었다가 1885년에 폐지된 시기와 거의 비슷하였다. 또한 고무쇼는 산업화 정책을 수행하기에 적합한 주요 정부기구였다. 고용 외국인의 대부분이 4개국, 영국,프랑스,미국과 독일 사람들이었으며, 그들 모두가 19세기 후반의 일본의 외교관계상 특별히 중시되었다. 영국인은 대개 산업기술성과 해군성에서 근무하였고, 프랑스인은 산업기술성과 육군성, 미국인은 문부성과 국토개발청에, 그리고 독일인은 내무성과 문부성에 근무하였다. 이러한 정부부문 중에서 문부성과 공무성이 최다수의 고용외국인을 차지하였는데, 이는 일본이 서구의 선진과학과 기술을 받아 들이는데 얼마나 열성적이었는가를 보여 주는 단적인 증거라 하겠다.
특히 15년 동안 공무성에 고용된 외국인이 580명인데, 그 중 450명(76.6%)이 영국인이라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사실은 산업화에 몸부림치는 일본이 영국에 의존하는 바가 얼마나 컸는 지를 보여 준다. 영국은 유럽에서 산업혁명을 가장 먼저 겪은 나라이다. 그리고 450명의 영국인 중 233명이 공무성의 철도국에 근무하였다. 이는 일본의 경제발전을 촉진하는데 발판이 되는 철도건설에 메이지 정부가 큰 비중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교육분야에서는 코가쿠료(뒤이어 코부 다이�코, 결국, 토쿄대학교의 일부가 됨.)는 산업과 기술을 발전시키기 위한 공무성 산하의 교육기관으로서 1873년에 설치되었다. 젊은 일본학생들을 기술 전문가로 양성하려고 공무성에 고용된 영국인 교수진이 1팀 있었다. 1887~1896년 사이에 시작된 일본의 산업혁명이 원활히 완수되도록 그 막중한 책무를 떠맡은 것도 바로 이들 일본의 기술전문가들이었다.
고용외국인은 봉급을 상당히 후하게 지급받았다. 그 중 몇명은 당시 일본의 관료조직에서 최고의 보수를 받던 수상의 급료와 맞먹는 800엔(당시의 환율로 800달러에 해당함.)을 받았다. 정부는 만성적인 재정난에도 불구하고, 외국인에게 엄청난 봉급을 지불해야 했다. 왜냐하면 일본이 서구의 선진국을 따라 잡을 때까지 희생을 감수할 필요가 있다고 확신하였다. 그 이유는 이렇다: 만일 우리가 외국의 전문가를 고용함으로써 우리의 공업과 문화를 발전시키고 국가이익을 증진시킬 수만 있다면 동전 한닢이라도 투자할 가치가 있다.
고용외국인이 한 역사에 남을 역할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메이지 정부는 외국의 근대적 제도와 공업생산 자본주의 방식을 이식하기 위하여 서구의 선진국을 모델로 삼고 고용된 외국인들은 일본인들로 하여금 짧은 기간 내에 서구의 과학과 기술을 배워서 숙달케 하였다. 따라서 외국인들은 근대 일본의 기초를 형성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이러한 문화 이식계획은 세계사에서도 전례가 없었다. 그러나 서구문명의 여러가지 요소를 받아 들이면서도, 메이지 정부의 지도자들은 끊임없이, 적절히 훈련을 받은 일본의 전문가들을 외국인과 교체함으로써 자주성을 확보하는데 전심전력을 다하였다.
위로부터의 근대화에 있어서 또 하나의 중요한 특징은 메이지정부가 기술자문으로 외국인을 효과적으로 배치한 사실이다. 일본이 그들의 근대화 계획의 여러 부문을 외국인에게 의존하면서도 정책결정의 권한은 정치지도자들의 수중에 확고히 갖고 있었다.
외국인을 배척하려는 개발도상국에 흔히 있는 극단적인 민족주의의 경향도 적지 않았다. 토쿠가와 정권말기에 일본은 또 한번 서구주의에 반대하는 파란을 겪었다. 그러나, 그후 외국인을 싫어하는 것과 외국이 보유한 지식과 기술을 수용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차별성에 분명한 태도를 취하는 기민성을 보였다. 따라서 일본은 천성적으로 지식과 기술과 같은 국경을 초월한 서구의 요소들을 적극적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고용외국인을 최대로 활용할 만큼 영특하였다. 또 똑같이 중요한 사실이지만, 최소한 정부의 지도자들은 외국에 관한 어느 정도의 지식을 갖추었고, 외국인을 최대로 활용하면서도 그들 스스로 자신의 근대정책을 수행할 주도권을 갖고 있었다. 여기에 일본 근대화의 성공비결이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