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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전: 일본은 있다(서현섭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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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문명개화, 시쳇말로 국제화의 과정은 우리와는 확연히 다른 길을 걸어 왔다. 중화 문명이든 서구 문명이든 일본이 외래 문명을 흡수하는 태도는 요란스러울 정도였다.
일본은 중국 문명을 조선 반도를 통해서, 또 더러는 그들 자신이 직접 중국에 유학생을 파견하여 학습하였다. 일본인들은 16세기까지는 중국의 기술이나 학문에 일본 정신을 접목시킨다는 의미에서 "화혼한재(和魂漢才)"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중국의 학예를 배우는 데 여념이 없었다.
16세기 중엽이래 17세기에 걸쳐서는 포르투갈이나 스페인으로부터 서양문물을 수입하는 소위 남만학(南蠻學) 시대를 구가했고 남만학은 다시 네덜란드를 중심으로 하는 난학(蘭學)과 연결되었다. 200여 년 동안 네덜란드가 최고인 줄 알고 그들의 기술이나 또는 네덜란드어로 쓰여진 서양 서적 수입에 열을 올렸다. 이 당시에는 "화혼난재(和魂蘭才)"의 시대였고 난학은 한일 양국의 근대화의 분기점을 마련해 주었다.
난학 만능시대는 1853년 미국 페리 제독의 일본 개국으로 끝장이 났다. 변신의 천재인 난학에서 영학(英學)으로 돌아섰다. 난학을 모태로 하여 발전한 영학은 명치 문화의 배경을 형성한 것으로 영어 학습과 동시에 영미의 학문 연구를 총칭한 것이었다. 페리 제독 내항 시일본측의 한 관리가 "I talk Dutch."라고 해서 미국 측을 놀라게 했다. 네덜란드어를 할 수 있다는 이 표현은 사무라이 영어의 제일성(第一聲)을 기록한 것으로 유명하다.
일본인들은 위기를 기회로 활용할 줄 아는 것 같다. 페리 제독의 강압에 의해 개국된 일본은 미국 배척 일변도로 나간 것이 아니라 영어 붐(Boom)을 일으켰다. 일본 근대사를 보면 일본은 서양과의 대결 끝에는 으레 서양 문물 흡수에 더욱 더 박차를 가했던 것이다. 반면에 강화도 조약으로 개국을 하게 된 우리 땅에서는 일본에 관한 어떠한 연구 분위기도 조성되지 않았다. 또 한미 수호조약 체결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한국과 일본의 다른 면이다.
영학의 대표적 선구자로 후쿠자와 유키치(ふくざわゆうきち)를 들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막부 말에 세 번에 걸쳐 해외여행을 하면서 영어 사전을 비롯하여 엄청난 분량의 서적을 구입하여 귀국한 후 이들을 정력적으로 번역하였다. 후쿠자와가 신일본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할 목적으로 1872년에 초판을 찍은 "학문의 권장"은 일본인들에게 엄청난 감화를 줘 물경 340만 부나 팔렸다. 이때 모은 돈으로 그는 경응의숙(慶應義塾)을 개설하고 1873년에는 미국인 교수를 초빙하여 "게이오"대학 황금기를 열었던 것이다. 당시 일본은 "마을마다 배우지 않는 집이 없고, 집마다 배우지 않는 사람이 없도록 한다."는 생각으로 일본전체가 교육열로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영학의 발전과 관련하여 기억해야 할 것은 1856년에 설립된 번역국과 양학연구기관의 성격을 띤 반쇼시라베쇼(蕃書調所)이다. 당초에는 네덜란드어를 주로 연구하고 영어를 부차적으로 다루었으나 1860년에는 네덜란드 연구는 아예 그만둬 버리고 영학 연구에만 전념하도록 하고 명칭도 양학소(洋學所)로 개칭하였다. 영학에는 기존의 영어 외에 프랑스어, 독일어, 천문, 지리, 물리, 화학, 기계공학 등과 같은 부국강병술(富國强兵術)과 식산흥업(殖産興業)의 과학기술을 포함시켰다. 이 연구소는 단순히 언어 연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서양 시장의 조사, 연구와 전문서적의 번역과 출판을 겸한 종합연구소였다. 이 연구소는 후에 개성소로 개칭되었는데, 유신(維新) 후에는 동경 제국대학으로 발전하였으니 동경대학은 결국 네덜란드어 연구에서 비롯된 것이다.
1862년 일본에서 영일 대역(對譯)사전이 출간됨으로써 본격적인 영학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으며 1877년 북해도 농업학교를 설립한 클라크 선생이 일본을 떠나면서 남긴 "소년들이여! 야망을 가져라."는 송별사에 감명을 받은 일본 청년들은 "화혼양재(和魂洋才)의 길로 매진(邁進)하였다.
명치 초기에 일본에 초청된 외국인 교사는 200명을 훨씬 상회하였으며 문부성 예산의 대부분은 이들의 인건비에 충당되었다. 일본은 외국인 교사 초빙을 통해서 서양에 대해서 배울 수 있었으며 한편 서양교사들 대부분은 일본인의 진지한 학습 태도에 호감을 갖고 본국에 돌아가 영, 독, 프랑스어로 일본에 대해 좋은 인상기를 남겼다. 결국 서양 교사들이 일본을 서양에 선전하는 훌륭한 홍보 활동을 한 셈이다. 일본에 대한 좋은 이미지 형성에 이들 일본 견문기가 한몫 단단히 한 것은 물론이다.
영학 숭배론은 진보적 개혁주의자이며 이상주의자인 모리 아리노리(森有禮)에 의해 절정에 달한다. 1885년 초대 문교부장관에 취임한 모리는 주장하기를, 일본 문화란 어차피 변방 문화이고 일본어는 한자 투성이이므로 차라리 일본어를 없애 버리고 영어를 국어로 삼자는 제안을 했다. 일본어는 일본 이외의 어떤 국가에서도 통용되지 않는 죽은 언어와 매일반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일본이 서양 대열에 끼기 위해서는 최소한 일본어를 로마자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주장까지 했을 때 국수주의자(國粹主義者)들은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술 더 떠서 그는 사무라이들이 칼을 옆에 차고 거들먹거리는 것을 돈키호테와 같다고 깍아 내리고 축첩(蓄妾)을 야만적인 행위라고 비난하였다. 모리 장관은 분명히 시대를 앞서가는 선각자였으나 너무 과격한 생각으로 인하여 서양심취자라는 낙인(烙印)이 찍혔던 것이다. 결국 그는 1889년 국수주의자의 손에 암살되고 만다.
일본의 영학은 1920년대에 이르러서는 급격히 퇴조한다. 교육의 독립을 내세워 영어를 필수과목에서 제외하자는 주장과 함께 중,고등학교에서 영어수업을 폐지하자는 극단론(極端論)도 있었다. 동경대학 일본문학과의 후지무라 교수가 그 대표적인 예인데, 그는 영어 교육으로 인해 사상 혼란을 초래하고 10개 과목 중에서 영어 수업시간이 전체의 5분의 1을 차지한다고 하면서 영어 폐지론의 선봉장이 되었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전쟁 중에도 영어 교육이 전폐된 적은 없었다.
태평양전쟁에서 패한 일본은 과거에도 그랬듯이 반미에서 친미로 급선회하였다. 기묘한 현상이었다. 일본인은 대체로 중용(中庸)적 입장을 선호한다. 그러나 문화 수용에 있어서는 과격한 측면이 엿보인다. 일본 사람은 보통 자기 생각을 명확히 주장하기 전에는 대단히 유연한 태도를 보이지만 일단 자기 주장이 외부로 표출된 다음에는 그 유연함을 잃어버린다. 하나의 방향이 정해지면 리더의 깃발을 따라 끝까지 가보자는 식이다. 때로 그것은 위험해 보이기도 한다. 사실 일본인의 속성에 대한 외국인, 특히 우리들의 비판은 그 점에 관한 것이 꽤 많다. 하지만 실제로 그들의 그런 단순성은 단결과 협동이라는 긍정적 가치를 생산해 내는 경우가 훨씬 많다는 것을 우리는 간과(看過)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한학(漢學: 중국을 배우자!)--> 남만학(南蠻學: 포르투갈, 스페인을 배우자!)--> 난학(蘭學: 네덜란드를 배우자!)--> 영학(英學: 영국,미국을 배우자!)의 과정을 통하여 이제 일본학(日本學)의 단계에 도달해 있는 일본, 그들이 이루어낼 학문적 결과가 기다려진다.